미국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부통령을 지낸 보수 정치인 딕 체니(83)가 오는 11월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하자 트럼프가 정계 원로 체니를 향해 “그는 ‘리노’(RINO)일 뿐”이라고 맹비난했다. 리노란 “이름만 공화당원”(Republican In Name Only)이란 표현의 줄임말로, 공화당원을 자처하지만 속으론 공화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 겉만 민주당이고 속은 국민의힘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수박’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7일(현지시간) UPI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는 전날 민주당 대선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지지한다는 체니의 성명이 나온 직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체니를 “이번 선거와 무관한 인물”이라고 깎아내렸다. 이어 “공화당 하원의원 예비선거에서 역대 가장 큰 표차로 패한 딸과 더불어 리노일 뿐”이라고 부녀를 싸잡아 비난했다. 체니의 딸은 공화당 하원의원을 지낸 리즈 체니(58)다. 리즈는 당론을 어기고 트럼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가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움을 샀다. 결국 2022년 지역구인 와이오밍주(州)의 예비선거에서 탈락하며 본선에 출마하지 못하고 의원 지위를 잃었다.
트럼프는 체니를 일컬어 “끝도 없이 이어진 무의미한 전쟁들의 왕”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체니가 부통령이던 시절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점령한 데 이어 이라크 전쟁을 벌여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제거했다. 아프간 전쟁에 대해 미 행정부는 “2001년 9·11 테러를 저지른 알카에다 세력에 대한 보복”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라크 전쟁의 경우는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WMD)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라는 명분을 들었다.
하지만 전쟁 이후 확인해보니 이라크는 WMD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거짓말 논란이 일었다. 당시 부통령이던 체니, 국방부 장관이던 도널드 럼즈펠드 같은 네오콘 강경파가 부시 대통령으로 하여금 전쟁을 결심하도록 끈질기게 설득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2001년 시작해 2021년까지 이어진 아프간 전쟁에서 미군 2400여명이 전사했다. 2003∼2011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4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트럼프가 체니를 사실상 ‘전쟁광’으로 규정한 것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앞서 체니는 성명에서 “미국 248년 역사상 트럼프보다 공화국에 더 큰 위협을 가한 인물은 없었다”며 “그래서 나는 해리스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민주당 해리스 대선 캠프는 “카멀라 부통령은 체니의 지지를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당보다 국가를 우선하는 그의 용기를 존경한다”고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