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에 따르면 파리장서비는 전국 네 곳에 있다. 경남 거창, 서울, 대구, 전북 정읍이 그 네 곳이다. 거창 장서비는 ‘파리장서비’이고, 나머지 네 곳의 것은 ‘한국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이다. 네 곳 중 세 곳의 장서비에 ‘유림’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파리장서운동의 주체가 유림이라는 사실은 저절로 헤아려진다.

유림이 파리장서운동의 주체였다는 점은 사실 대단한 자랑거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유림을 비난할 수는 없다. 경북 영덕 신돌석 의병장이 거의 유일한 예외였을 만큼 유림의 구한말 창의는 정말 대단했다. 다만 나라가 망하고 약 9년 뒤 일어난 기미만세운동 때 유림은 별로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들이 추구하는 공화정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 때문이었다. 유림은 임금에 대한 ‘충(忠)’에 큰 사상적 가치를 둔 집단이었으므로 왕이 없는 공화정(共和政)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국권을 회복한 후에도 ‘전주 이씨’ 임금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있었다.

전국적으로 온 민족이 궐기하여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고, 그 영향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유림들도 3.1운동에 소극적이었던 데 대한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강화회의에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서 운동’이었다.

장서(長書)는 ‘긴(長) 글(書)’이므로 파리장서운동은 파리강화회의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지지해달라는 긴 서한을 보낸다는 뜻이다. 전국 유림 137명이 서명을 했는데, 대표가 경남 거창 출신 선비 곽종석이었다. 그래서 1977년 9월 23일 거창군 거창읍 강변로 109번지에 ‘파리장서비’가 세워졌다.

그보다 4년 전인 1973년에는 서울 중구 동호로 257-8 장충단 공원 안에 ‘한국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가 건립되었다. 1997년에는 대구 달서구 상인로 128번지 월곡역사공원, 2001년에는 전북 정읍 시기동 산9번지 정읍사문화공원에도 같은 이름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중 대구 상인동 장서비 해설은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는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피해실정을 밝인(인용자 주: ‘밝힌’의 오기) 1420자에 달하는 장문의 글로써 곽정석(인용자 주: ‘곽종석’의 오기)이 글을 짓고 김복한 등 전국의 유림 137명이 연서한 문서이다”로 시작한다.

“김창숙이 주동하여 서울과 영남 각지와 호남 동서부까지 연락하고 경비를 마련하여 장서를 휴대하고 상해로 건너가 중국어, 영어로 번역하여 3종의 장서를 김규식에게 맡겨 파리강화회의에 보내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고 중국의 언론기관과 일본에도 발송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온 세계에 공표하였다.”

1922년 10월 9일 이경균(李璟均)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경북 김천 석현면 하원리 169번지를 본적으로 둔 이 지사는 1850년 7월 2일 출생하였으니 향년 72세였다.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죄’로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곤욕을 치렀다. 파리장서운동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의 ‘이경균’ 부분을 읽어본다.

(전략) 1919년 3월 (중략) 유림 지도층인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은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한 장서를 파리강회회의로 발송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한국의 독립이 국제 여론의 지지를 얻게 되면 독립을 실현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내린 결과였다.

당시 일제가 한국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에 유림 명의를 조작해 넣으면서 파리장서 작성과 연명은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결국 곽종석·장석영이 작성한 파리장서 초안에 최익길·이석균과 함께 서명하였다.

1919년 3월말 김창숙을 통해 유림 137명이 연명(連名)한 장서가 파리로 송달되었다. 하지만 1919년 4월 2일 성주 읍내의 대규모 만세시위에서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한 유림 일부가 체포되면서 파리로 장서를 보낸 사실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서명자가 다수 밀집한 성주지역에서 일제 경찰의 색출작업이 벌어졌고, 그 여파로 친족인 이석균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유화정책에 따라 파리장서 사건을 주도한 유림 지도층 일부를 제외한 유림들이 석방되자, 이때 함께 풀려났다.

소개문 끝이 “저서로 <윤강도(倫綱圖)>·<성학전수(聖學傳授)>·<양로례(養老禮)>·<연성문헌(延城文獻)>·<계헌집(稽軒集)> 등이 있다”로 마무리된다. 마지막 문장은 이경균 지사가 선비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헤아리게 해준다. 철학 이론과 시로 구성된 개인문집이 없으면 선비로 인정받지 못했던 조선시대가 21세기 한국사회보다 더 품격높은 세상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