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미국 기자 님 웨일스는 옌안에서 중국혁명을 취재했다. 옌안은 대장정을 마친 중국공산당의 최후 근거지였다. 그곳에 루쉰 도서관이 있었는데, 영어책을 많이 대출해가는 조선 청년에게 눈길이 갔다. 그것이 두 사람의 첫 인연이었다.
그날 이후 님 웨일스는 젊은 조선 혁명가와 20여 차례 이상 만났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깊은 대화는 1941년 <아리랑>이라는 책으로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님 웨일스는 책에서 조선 혁명가를 “김산”이라 불렀다.
김산의 ‘김’은 한국인들 중에서 가장 흔한 성씨를, ‘산’은 가장 아름다운 산 금강산을 가리켰다. 즉 님 웨일스의 ‘김산’ 작명은 <아리랑>이 ‘아름다운 한국 사람’의 삶을 담은 책이라는 암시였다.
하지만 김산은 자신과 님 웨일스 공저로 세상에 태어난 <아리랑>을 못 보았다. 책이 태어난 당시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1905년생 김산은 살아있는 경우 1941년에 36세였지만 이미 1938년(33세) 일본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張志樂)으로, 일본의 취조 기록에는 장지학으로 나온다. 그는 1905년 압록강 바로 아래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14세) 만세 시위에 적극 참가했고, 그 이듬해(1920년, 15세) 해외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고학 생활 중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다녔다. 졸업 후 상하이로 가서 잠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식자공으로 일했다. 의열단에 가입해 장래가 기대되는 어린 후배로 듬뿍 사랑을 받기도 했다.
1921년(16세) 북경 소재 협화의학원(協和醫學院)에 입학했다. 그는 의학 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당시 중국을 풍미하던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부지런히 사상서적을 탐독했고,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면 조선의 독립도 가능하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대동단결하여 공동의 적인 일본을 물리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924년(19세) 김성숙 등과 함께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해 잡지 <혁명>을 간행했고, 고려공산당 북경지부 설립에 참가했다. 이듬해인 1925년(20세) 광동으로 갔다. 당시 광동은 중국혁명 본거지였다. 그가 광동으로 간 데에는 중국혁명의 성공에 일조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작동했던 것이다.
광동에서 그는 1926년(21세) 김성숙 등과 조선혁명청년동맹을 조직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기관지 <혁명운동>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김원봉이 이끄는 황포군관학교에서 교편도 잡았다. 이 무렵 장지락은 의열단 중앙집행위원이었다.
그는 1930년과 1933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에서 국내로 압송되었다. 두 번 모두 그 이듬해까지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36년(31세) 김성숙·박건웅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 활동을 하다가 1937년 옌안으로 왔다. 이때 님 웨일스를 만났다.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는 장지락을 “두 번의 투옥과 고문, 질병과 궁핍 등 모진 고난을 불굴의 의지로 이겨 내며 중국 혁명을 위하여 싸우는 한편, 중국과 조선의 혁명 세력을 연결하려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독립운동가로 묘사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그를 일본 간첩이라며 1938년(33세) 10월 19일 처형했다. 중국공산당은 처형 45년 만인 1983년 1월 일본 간첩이 아니라며 그를 명예 회복시켰다. 하지만 너무나 허망한 일이다. “우리는 <아리랑>을 통하여 살아 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지만, 그저 스스로를 향한 위안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