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0월 15일 유규년(柳奎秊)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경북 상주 화북면 용유리 260번지에서 1881년 10월 4일 태어났으니 향년 68세였다. 이강년 의병군의 일원으로써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다.
겨우 15세에 지나지 않았던 1896년, 유규년은 고향 문경 가은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창의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그 휘하에 들어 일본군과 싸웠다. 고종의 왕명으로 전국의 의병군들이 해산하게 되면서 이강년 의진도 활동을 멈추자 유규년도 집으로 돌아왔다.
1896년 15세 때 이강년 의병군에 처음 가입
1907년 일본이 한국 정규군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정미의병이 궐기했다. 유규년은 다시 이강년 의진에 가담했다. 그는 좌종사부(坐從事部, 현 군수참모부)에 배치되어 물자를 신속히 조달하고 지원함으로써 전투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이강년 의진은 그해 5월 27일 강원도 원주·횡성·강릉 지역에서 병력과 물자를 보충한 후 충북 제천으로 향했다. 제천을 가던 중 영춘군 용소동(현 단양군 영춘면 동대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그 바람에 종사(從事) 주범순과 정겸동이 전사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이 무렵, 강제 해산의 치욕을 겪은 한국군 정규 군사들이 의병 부대를 찾아와 자진 입대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강년 의진에도 해산 군인들이 합세하였는데 이강년 의병장은 그들 가운데 변학기를 우군장으로 임명하는 등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해산당한 한국 정규군 군사들, 의병부대 합류
유규년을 비롯한 군수참모부는 정규군 출신들이 가져온 군수품을 배향산에 정리해서 보관했다. 해발 808m 배향산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두산리와 횡성군 안흥면 월현리 및 부곡리의 경계에 있다.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자신의 스승 원천석을 중앙조정의 관리로 임용하기 위해 모시러 왔다.
원천석은 고려 멸망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유명 회고가를 남긴 선비이다. 그는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더라”라며 슬퍼했다. 태종을 만날 리 없었다. 피해서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결국 태종은 스승이 숨은 산을 우러러(向) 절(拜)을 한 후 돌아갔다. 그 일로 배향산(拜向山)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망국의 설움을 담은 원천석의 시조는 오늘날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흔히 보는 작품이다. 유규년 등 의병들은 배향산에 무기를 숨기면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강고히 했을 것이다.
조령, 갈평, 단양, 영춘, 영월 등 숱한 전투를 지원
8월 들어 이강년 의병군이 문경에 당도했다. 이때 유규년은 충주성 공격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했다. 그후 9월에는 조령 전투, 갈평 전투, 단양·영춘 지역 전투, 영월 지역 전투, 원주 누치 전투 등을 지원했다. 11월과 12월에는 죽령·순흥(현 영주시 북서부 일대) 전투, 영월 전동리(현 영월군 한반도면 광전리) 전투 등에 참전했다.
1908년 이강년 의병군이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에 주둔하게 되면서 5월 서벽 전투, 내성(현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 전투, 6월 재산(현 봉화군 재산면) 전투 때에도 한몫을 감당하였다. 하지만 6월 청풍 작성 전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부상을 입고 피체되어 순국하고 말았다.
이강년 의병장 순국 이후 은둔 생활
이 무렵 유규년 지사의 나이 27세였다. 너무나 젊은 나이이지만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 싸우면서 보낸 세월은 이미 12년이나 되었다. 의병장의 죽음을 겪으며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2년 사이에 마침내 나라까지 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 유규년은 왕천석처럼 은둔하며 한많은 삶을 어렵사리 이어갔다.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군이 되지는 않았다. 그랬더라면 더 훌륭했을 것이라고 말할 일은 아니다. 나라와 민족공동체를 위해 그만큼 헌신했으면 됐다. 그래도 조국 독립을 보고 1949년 타계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또 동족상잔 전쟁은 아니 보았으니 그 또한 얼마나 다행인가!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