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북서쪽으로 87㎞ 정도 올라가면 클라크스빌이라는 소도시가 나온다. LG전자 가전공장이 둥지를 튼 곳이다. 직접 둘러본 세탁·건조기 생산라인은 그 자체로 거대한 로봇이었다. 하얀 다관절 로봇팔이 지름 57.5㎝짜리 스테인리스스틸 재질의 원형 세탁조를 2층 컨베이어벨트에 놓으면 인공지능(AI)과 연동된 카메라가 불량 여부를 판독했다. 166대의 무인운반차(AGV)는 각종 부품을 쉴 새 없이 실어 날랐다.

이 공장의 자동화율은 LG전자 창원공장(53%)보다 높은 66%. 높은 인건비에도 미국 공장이 경쟁력을 갖춘 이유다. LG전자는 모든 수입품에 10~20% 관세 부과, 멕시코산엔 25% 관세를 공언한 ‘트럼프 2.0 시대’를 맞아 테네시 공장 증설 여부를 검토 중이다.

LG가 미국 가전공장 증설을 검토하는 것은 관세 때문만은 아니다. 물류비 절감과 제품 공급 기간 단축에 더해 제조업 부활을 기치로 내건 트럼프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도 트럼프 2.0 시대를 앞두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멕시코 가전 공장에서 생산하는 미국 수출용 냉장고 물량 중 일부를 광주공장으로 가져온 게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멕시코 수입품에 관세 25%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한국 생산이 오히려 비용 측면에서 유리해졌다고 판단한 결과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 4분기까지 광주공장 냉장고 생산 물량의 약 30%를 멕시코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최근 전략을 수정했다”며 “트럼프 당선인의 관세 정책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미국 내 시설 투자에 속도를 낼 계획이다. 전자업체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2기를 맞아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지 전략이 미국 정책의 영향을 받아 재편되고 있다”고 했다.

“축구장 100개 규모 평탄화”
멕시코산 25% 관세 현실화땐 즉시 대규모 확장 가능토록 준비미국 테네시주 클라크스빌에 자리잡은 LG전자 가전공장 뒤편에는 축구장 크기 100배가 넘는 큰 공터가 있다. 세탁기 연 120만 대, 건조기 60만 대, 워시타워(세탁·건조기) 35만 대를 생산하는 현 공장을 4개 더 지을 수 있는 땅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LG전자는 평탄화 작업을 마친 이 공터에 TV 공장과 세탁기 공장, 냉장고 공장 등을 짓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모든 수입품에 10~20% 보편관세를 물리고, 멕시코산 제품에는 25% 관세 부과 방침을 밝힌 데 따른 것이다.

7년 전 관세 위기 재연삼성전자와 LG전자가 미국에 가전 생산거점을 마련한 건 2018년이다. 삼성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뉴베리에, LG는 테네시주 클라크스빌에 둥지를 틀었다. 트럼프 1기 때인 2018년 1월 미국 정부가 자국 가전업체 월풀의 청원을 받아들여 세탁기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를 시행해서다. 세탁기가 삼성과 LG 미국 공장의 주력 생산품이 된 이유다. 당시 삼성과 LG는 미국 공장 건설을 앞당기고 생산 물량을 늘려 위기를 돌파했다.

지금 상황은 7년 전과 비슷하다. 트럼프 당선인이 무차별적인 ‘관세 폭탄’을 예고해서다. 이렇게 되면 2020년 7월 발효된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에 따라 무관세 혜택을 노리고 멕시코 생산 거점을 확대한 삼성과 LG는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 전자업체 고위 관계자는 “한국 기업 점유율이 높은 냉장고와 TV 등이 ‘관세 폭탄’의 1차 타깃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북미 추가 투자 속도한국 가전기업들은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된 직후부터 대응 계획을 짰다. 예컨대 관세는 냉장고 등 특정 제품에 부과, 부품 또는 원재료에만 부과, 중국산에만 부과, 모든 역외 국가에 부과 등 다양한 시나리오를 놓고 공급망 계획을 재설계했다.

국내 기업이 가장 원하는 건 미주 생산거점으로 구축해놓은 멕시코산에 무관세가 유지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 미국 현지 생산을 늘리는 방안도 마련했다. LG는 테네시 공장 증설을 검토하고 있다. 삼성은 멕시코산에 25% 관세가 부과될 경우에 대비해 최근 멕시코 냉장고 생산 물량 일부를 광주공장으로 가져왔다.

가전업체 고위 관계자는 “세계 양대 시장 가운데 중국은 이미 하이얼, 샤오미, TCL 등 현지 기업에 넘겨준 걸 감안할 때 미국은 놓칠 수 없는 시장”이라며 “2018년 세이프가드 때 발 빠르게 대응한 그대로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400억달러(약 59조원)에 달하는 미국 가전시장을 둘러싼 또 다른 변수는 매물로 나온 월풀이다. 미국 시장점유율 14.3%를 차지한 월풀을 누가 인수하느냐에 따라 미국 시장 판도가 흔들릴 수 있다. 하이얼이 GE 가전사업을 인수한 것처럼 월풀도 중국 손에 넘어가면 한국 기업엔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 투자 확대가 한국 가전기업에 또 다른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란 분석도 있다. 미국 고객이 원할 때 바로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순발력’이 생기는 만큼 시장 점유율 확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LG전자 테네시 공장 관계자는 “현지 생산을 늘린 덕분에 미국 세탁기와 건조기 시장 1위(지난해 3분기 기준)가 될 수 있었다”며 “해외에서 생산할 때보다 제품 공급 기간을 4분의 1로 줄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국 동남아시아보다 5~6배 높은 인건비는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LG는 자동화율을 높여 인건비 부담을 최소화한다는 방침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2/0004002879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