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다면’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1990~2000년대 남부럽지 않은 전성기를 보냈다. 크고 작은 기부 활동으로 ‘연예계 기부 천사’라는 대중의 찬사도 받았다. 뜨겁던 인기와 관심은 예전만 못하지만 SNS를 통해 자랑스레 신앙을 고백하는 가수 김장훈(62)은 “지금이 인생의 리즈시절(전성기를 뜻하는 유행어)”이라고 자신한다. 그는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큰돈이 우습게 보이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평안함과 감사함으로 행복을 느끼고, 그 분량이 요즘 최대치이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청소년 교회를 개척해 평생을 수고한 목회자 어머니의 뜻을 잇듯 청소년 세대를 이야기할 때 그의 눈빛은 아이처럼 빛났다.
불우한 시절도 허투루 쓰지 않은 그분
김장훈 하면 ‘기부왕’이 떠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직접 집계해본 적도 없지만, 그가 보육원 독도홍보 활동 등으로 세상에 흘려보낸 후원금은 국내 연예인 중에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다. 김장훈은 “다른 뜻은 없었고, 그냥 좋아서 했다”고 말했다.
그런 기부 DNA는 배고픔과 외로움에 사무쳐봤던 과거 덕분이라고 했다. 타인의 어려움이 누구보다 잘 보이는 안테나가 달린 것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고, 천식을 심하게 앓아 초등학교에 다니지 못한 채 3년을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사업을 크게 하며 나눔에 인색하지 않던 어머니의 영향도 컸다. 모친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에 찾아오던 상이군인을 내치지 않고 돈이나 쌀을 쥐여줬다.
어머니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며 그는 수시로 가출했다. 심한 반항으로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학교 밖 청소년으로 살며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온갖 유혹에 시달렸지만, 나쁜 길로 빠지진 않았다. 김장훈은 “수천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막아주신 것 같다”고 했다. 미션스쿨 중학교에 다니며 예배와 찬양과 가까웠던 자신에게 하나님과 연결된 가느다란 끈이 늘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
모친 뜻 이어… 젊은 세대 향한 사랑
이렇다 할 방송 활동이 없던 2010년쯤 그가 온라인에서 회자되던 일이 있었다. 음 이탈 부분만 모아 편집하는 식으로 그의 가창력을 폄훼하던 일부 누리꾼들이 급기야 ‘숲튽훈’이라는 비하 캐릭터까지 만들어 조롱하면서다. ‘숲튽훈’은 그의 이름 한자인 김(金)과 장(長)을 한글로 읽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김장훈은 누리꾼 입길에 오르내리는 걸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별명을 만들어준 온라인 커뮤니티에 직접 댓글을 다는 등 젊은이와 소통할 기회로 삼았다. 수년 전부터 그의 공연에 10~20대가 관객으로 찾아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고등학교에 초대받아 학생을 위한 콘서트를 여는 일도 생겼다. 김장훈은 “공연 한 번으로 아이들이 달라질 순 없겠지만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방방 뛰면서 소리지르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부모님과 선생님이 봤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는 청소년에겐 성인의 3분의 1 정도의 공연료를 받고 있다.
젊은 세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은 그의 어머니와 닮았다. 50세가 넘어 신학을 공부한 그의 어머니 김성애(88) 목사는 2001년 청소년을 위한 교회인 ‘십대교회’를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세웠다. 김장훈은 개척 자금을 거의 대다시피 했다. “어머니는 헌금이 없는 교회를 만들고 싶어하셨어요. 아이들이 편히 쉴 수 있고 주인공으로 헌신하고 나중에 하나님으로 충전된 상태로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말이죠. 실제로 어머니 교회의 청소년이 자라서 현재 저의 든든한 동역자가 돼주고 있어요.”
군대 위문 공연도 시작했다. 그는 최근 논산 육군훈련소 안의 연무대군인교회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 앞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찬양인 실로암을 함께 불렀다. 김장훈은 “훈련 주기인 5주마다 한 번씩 가려고 계획하고 있다”며 “한국을 이끌어갈 청년들을 맘껏 축복해주고 싶다”고 했다.
SNS서 당당히 드러내는 신앙 고백
김장훈은 요즘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근황을 올리며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고 있다. ‘범사에 감사하는 가수’라고 자신을 표현하고, ‘정말 할렐루야입니다’라는 식으로 감탄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인터뷰하고 싶다’는 기자 요청에도 “맘껏 하나님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과거엔 기독교인을 욕 먹이고 싶지 않아 공개적으로 기독교인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욕과 술을 끊기도 했고, 이제는 ‘기독교인이 왜 저러냐’고 욕 먹이지 않을 수 있겠단 용기가 생겼다”며 웃었다.
그런 당당한 신앙고백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예전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규율에 얽매이고 지켜야 할 것이 많아서 불편하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 오히려 자유롭다는 것을 요즘에야 느끼고 있어요. ‘교회에 가야 하는데…’ 하는 의무감이 사라지고 ‘교회 가고 싶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까요.”
그가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던 건 신앙의 선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척교회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어머니가 대표적이다. “강직하고 투명하고 거짓이 없는 분이다. 항상 제게 ‘종교인 아니고 신앙인이 되라’며 아이 같은 신앙과 믿음을 강조하셨다”며 “또 일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상의하고 조언을 구했다”고 했다.
10년 전 대학생 봉사를 하며 만났고 현재 출석하는 서울 관악구 시냇가푸른나무교회의 신용백 목사도 그렇다. 김장훈은 “만성신부전증을 앓는 성도에게 신장 기증을 해주신 분”이라며 “특히 청년 사역에 대한 진실한 마음이 느껴진다”고 했다.
‘사랑받는 가수가 됐으니 그 사랑을 세상에 베풀 줄 알아야 한다’며 어머니가 잔소리처럼 해온 권면대로 그는 주변에 사랑을 나누며 돌보는 일을 습관처럼 해내려 한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유가족 곁에서 그들을 위로한 것도 그런 이유다. 그에겐 교통사고로 5살 난 조카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슬픔을 신앙으로 극복한 경험이 있다. “믿음이 아니고서야 그 슬픔을 위로할 수 없겠다 싶었고, 먼저 회복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십자가를 부수고 싶을 정도”로 오래 절망했다던 그는 “천국에서 조카를 다시 만날 날이 가까워져 간다는 기대와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산다”고 했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던 지난해 연말 그는 예정된 콘서트를 조용히 취소했다. 비슷한 시기 세월호 유가족이 운영하는 카페를 찾아가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장애인도 그가 관심을 쏟는 분야다. 지난해 4월 장애인의 날을 기념해 강남구 코엑스의 별마당 도서관에서 중증장애인을 위한 ‘누워서 보는 콘서트’를 개최했다. 몸이 불편해 그동안 현장 관람을 해보지 못했던 이들을 관객으로 초대한 행사로, 지난 2년간 7차례 열었다. 올해도 세 차례 공연 계획이 거의 성사됐다.
김장훈은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어쩌면 편견이 아닌 낯섦에서 온 것일 수 있다”며 “제가 장애인 시설을 만들 순 없지만 그들을 향한 시선을 바꿀 순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남은 인생의 유일한 방향은 소명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제 신앙의 깊이는 잘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해요. 어린아이가 어머니만 쳐다보듯 저는 하나님만 바라봐요. 그분이 제게 주신 미션을 통해 영광을 돌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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