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관념’은 국제 관계의 숨은 열쇠다. 한 국가의 역사와 경험이 녹아든 이 관념은 외교 정책의 근간을 이룬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세계 정세의 실체를 놓치기 쉽다.

미국의 지정학적 관념은 대서양을 중심으로 한다. 태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미국인의 눈에 세계의 중심은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이다. 특히 중동은 미국 국내 정치와 직결된 최우선 외교 사안이다. 따라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중동 상황은 미국 대선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년간 미국의 바이든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전략적 동맹과 가자지구의 인도주의적 위기 사이에서 균형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무기력한 패권국의 모습을 보이며,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유엔 발표에 따르면 2024년 10월 기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4만 3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팔레스타인인 4만 1000여 명, 이스라엘인 1700여 명이며, 절반 이상이 아동과 여성이다. 230만 명의 가자지구 피란민들은 이스라엘군의 봉쇄로 식량, 의약품, 깨끗한 물이 부족해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바이든 정부의 중동 정책은 이중성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스라엘의 ‘과도한 대응’을 우려하면서도, 전례 없는 규모의 군사 지원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운대학 왓슨연구소 집계에 따르면, 바이든 정부는 작년 10월 이후 이스라엘에 227억 달러를 지원했다. 이는 가자지구 원조액의 30배를 넘는 규모이며, 그중 179억 달러는 역대 최대 규모의 군사 원조다.

이 군사 원조와 함께 100건 이상의 무기 이전이 이뤄졌다. 탱크, 포병 탄약, 정밀 유도 폭탄 등이 신속하게 공급됐고, 이스라엘 현지 전략무기 비축고 물자까지 제공됐다. 문제는 이 무기들이 가자지구 민간인 거주 지역 폭격에 사용되면서 국제법 위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바이든 정부는 무기 판매를 중단하지 않았고, 우크라이나와 달리 사용 제한도 두지 않았다. 미국 내 무기 판매상들의 로비 힘이 더 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막대한 지원에도 바이든 정부는 이스라엘에 대한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주요 군사작전을 미국과 사전 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향후 이란에 대한 보복 공격도 바이든 정부 뜻과 다르게 전개될 것임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미국 민주당 일각에서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을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갈등을 조장한다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의도와 무관하게, 지난 1년간의 상황은 바이든 정부의 중동 외교정책이 이스라엘에 볼모로 잡힌 형국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미국의 대이스라엘 정책은 복잡한 내부 역학의 산물이다. 유대계 인구는 전체의 2.4%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력은 이를 크게 상회한다. 주요 언론사, 싱크탱크, 월가, 학계 등에서 유대계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이스라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해외 원조의 최대 수혜국이기도 하다. 2020년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현재가치로 약 1423억 달러의 지원을 받았다. 트럼프 대통령 재임 당시인 2016년에는 2028년까지 매년 38억 달러의 군사원조 약속이 이뤄졌고, 지난 1년간 바이든 정부에서 그 규모가 4배 이상 증액됐다.

이스라엘 로비, 특히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는 막대한 자금력으로 워싱턴의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AIPAC의 지원을 받은 후보들이 압도적으로 당선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런 강력한 로비로 인해 미국의 중동정책은 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입장에 종속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 결과, 미국의 편향된 이스라엘 정책은 글로벌 리더십에 심각한 도전을 초래하고 있다.

유럽의 외교적 입장이 미국과 점차 뚜렷이 갈라지고 있다. 2024년 2월, 네덜란드 법원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내 국제법 위반가능성을 들어 F-35 전투기 부품 수출 중단을 명령했다. 프랑스도 이스라엘에 대한 특정 무기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에 대해 휴전과 인도주의적 지원을 요구하며 미국과 차별화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중동에서도 미국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아랍 바로미터 조사 결과, 2024년 초 중동 및 북아프리카 10개국에서 미국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평균 28%로, 2004년 조사 시작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유엔에서도 중동 문제에 관해 미국이 소수 입장에 놓이는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정에서도 미국만 거부권을 행사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 틈을 중국이 파고들고 있다. 2023년 3월, 중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관계 정상화를 중재했으며, 500억 달러 규모의경제 협력을 약속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중동 국가들이 미국을 배제한 채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미국기업의 투자는 감소하는 반면 중국 등의 투자는 증가하고 있다.

만약 미국 패권의 쇠퇴가 본격화된다면, 중동에서의 리더십 상실이 그 첫 징후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이 악화되면서 미 대선의 돌발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주요 경합주의 표심 변화가 특히 주목된다. 미시간에서는 20만 명에 달하는 아랍계의 민주당 지지 철회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2020년 대선에서 1% 미만의 근소한 차이로 승부가 갈렸던 위스콘신, 애리조나 등의 경합주에서 이러한 변화는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 있는 중대한 요인이 될 전망이다.

젊은 유권자들, 특히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가자지구의 인도주의 위기에 대한 정치권과 바이든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들의 투표 행태 변화 역시 초박빙이 예상되는 경합주들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즉,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해리스에게는 투표하지 않는 젊은층이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트럼프 지지층은 바이든 정부의 대외 정책을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주요 쟁점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막대한 군사 원조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는 점과, 이 자금이 국내 문제 해결에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2년간 1750억 달러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지원금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 자연재해 대응보다 해외 군사원조와 불법 이민자 지원에 더 많은 예산이 할당된다는 비판이 중도층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다.

누가 당선되든, 미국의 차기 정부는 당분간 중동 문제에 깊이 관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결과적으로 동맹 체제 전반과 동북아시아를 포함한 다른 지역에 대한 전략 및 자원 배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약화와 중동 정세의 변화는 한국 외교에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세 가지 방향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외교적 유연성의 필요성이다.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나 동맹 관계에 지나치게 구속되면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윤석열 정부처럼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경직된 외교 방식은 중장기 국익에 해롭다. 국익을 위해 정파를 초월한 유연한 외교 전략 수립이 시급하다.

둘째, 국익과 보편적 가치 사이의 조화다. 단기적 실리나 도덕적 가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강대국의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보편적 가치와 원칙을 지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 가자지구 인도주의 위기에 대한 독자적 지원과 평화 중재 노력은 이러한 균형 잡힌 접근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가자지구 평화를 위한 다자간 협력체 구성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셋째, 미국의 중동 정책 변화가 동북아 전략에 미칠 영향에 대비해야 한다. 미국의 관심이 중동에 집중되는 동안, 일본이 미국과의 역할 분담 확대를 통해 동북아 군사질서 재편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아시아판 나토’ 창설 제안, 미일동맹의 격상 움직임, 그리고 미일동맹 재조정 논의에 주목하고 이에 대한 전략적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국익과 가치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며, 그 책임 또한 우리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