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0월 15일 성필환(成必煥) 지사가 향년 73세로 타계했다. 본적이 “경상북도 상주(군) 상주(면) 각양리(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인 지사는 1896년 2월 27일 출생했다.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과 그 후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어 고문과 투옥을 겪었다.
그는 23세이던 1919년 3월 23일 상주 장터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상주공립보통학교를 함께 졸업한 강용석 그리고 한암회(일명 한감석)·조월연·석성기 등과 여러 차례 모의한 끝에 성사시킨 시위였다.
당시 음력 2일과 7일에 장이 선 상주면 읍내시장은 하루 거래액이 2,500원(현 시세 2억 5천만 원) 에 이를 만큼 대단했다. 당연히 장터가 열리면 군중들로 가득 찼다. ‘경상’도라는 이름이 ‘경’주와 ‘상’주의 첫 글자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상주 장의 규모가 그처럼 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5시 30분쯤 500여 군중과 함께 기쁜 얼굴로 “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었다. 그래도 주모자 중 한 사람인 성해식이 다시 6시 40분쯤 새로 참여한 학생들까지 이끌고 2차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그는 한 달 동안 미결수로 있으면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윽고 4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은 그에게 소위 보안법 위반을 적용해 징역 6월형을 언도했다.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끈 다른 동지들도 모두 피체, 고문, 투옥을 겪었다.
만기 출소했지만 그는 ‘개과천선’을 하지 않고 여전히 ‘불령선인’으로 머물렀다. 풀려난 지 채 몇 달 되지 않은 1920년 5월 4일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김교순이 찾아왔다. 김교순의 임무는 군자금 모집이었다.
성 지사는 상주면 복용리 박인양에게 군자금 모집의 취지와 의의를 밝히고 2만 원을 요구했다. 대구 앞산 안일암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 민족시인 이상화 등의 ‘ㄱ당’ 등이 부호들에게 독립운동자금 출연을 요구하다가 피체되었듯, 성필환 지사도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대구지방법원은 6월 9일 그에게 징역 10월형을 선고했다.
성필환 지사와 관련해 좋은 이야기를 두 가지 하려 한다. 하나는 1987년 10월 18일 경북 상주시 신봉동 산2-1번지 남산공원에 건립된 ‘항일독립의거 기념탑’이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의거를 일으킨 <운수 좋은 날>의 현진건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현창 시설 하나없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그렇게 견주면 성필환 지사는 얼마나 다행인가!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의 ‘항일독립의거 기념탑’ 해설을 읽어본다. 해설문은 이 탑을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의 항일운동 기념탑”으로 규정하고 있다. 강용석, 성필환, 한암회, 조월연, 석성기 등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 40명의 항일투쟁 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현창 시설이라는 뜻이다.
1919년 3월 23일 상주군 상주장터에서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과 성필환, 서울 중동학교 학생 한암회(일명 한감석), 상주공립보통학교 학생 조월연, 경성 국어보급학관 학생 석성기 등과 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중순부터 계획을 세우고 1919년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 상주장터에서 500여 명의 군중들과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87년 10월 18일, 상주 항일독립의거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 40명의 항일투쟁의 정신을 기리고자 이 탑을 세웠다.
다른 하나는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성필환’ 부분에 붙어있는 댓글이다. “증조할아버지께: 감사하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자손들이 그 용기와 정신만은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가 전문이다.
일반 국민은 물론 독립유공자 후손들마저 항일운동에 무관심해진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요즘 분위기다. 고위 공직자들이 ‘친일’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발설하는 사례도 잦다. 이런 때에 독립유공지 후손의 “감사하다는 말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는 진심을 확인하는 것은 절말 즐거운 ‘체험 학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