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10월 28일 대구부 중심 일원을 놀라게 한 폭발음이 터졌다. 독립지사 장진홍(張鎭弘) 선생이 기획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였다. 그후 장 지사는 영천 등지에서 제2의 거사를 도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제 경찰은 이원록, 이정기, 황진박 등 평소 불량선인으로 지목해온 인사들을 강제 연행해 무자비한 고문을 실시했다. 이때 이원록의 대구형무소 수인 번호가 264번이었는데, 그 숫자는 ‘이육사(李陸史)’라는 필명이 되어 한국문학사에 아로새겨졌다.
이육사 시인의 필명을 낳은 장진홍 의거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 지사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 벌인 끝에 순국했다. 그로부터 약 열 달가량 시간이 흐른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 지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가 일어났다.
일제는 2년 뒤 체포한 범죄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만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는 당시 사회를 뒤흔든 큰 사건이었다. 형량 자체가 자연스레 장진홍이 누구인지, 이 사건의 경과가 어떠한지 궁금하게 만든다.
32세 청년, 직접 폭탄 제조해 위력 시험도 마치고
1895년생인 장진홍은 1907년 인명학교(현 구미 인동초등) 학생 때 장지필 선생을 만나 항일의식을 배웠다. 1916년 12월 고향 출신 이내성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는 1918년 만주 봉천(심양)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했다.
줄곧 기회를 엿보며 경북 경산시장에서 약 판매상을 하고 있던 1927년 4월, 이내성이 일본인 폭탄전문가 굴절무삼랑(掘切茂三郞)을 소개해 주었다. 굴절무삼랑은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 공산주의자로서 조선 무산계급의 해방을 염원한 때문이었다.
일본인 굴절무삼랑, 한국 독립에 힘을 보태다
굴절무삼랑에게 폭탄 제조법을 익힌 장진홍은 1927년 10월 1일 자신이 만든 폭탄을 가지고 칠곡과 선산의 경계 휘안고개로 갔다. 위력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인적이 없을 때를 틈타 폭탄을 터뜨리자 양쪽 절벽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만족한 장 지사는 곧장 귀가해 폭탄 추가 만들기에 몰두했다.
10월 16일 칠곡군 인동면 자택에서 폭탄 제조를 마친 장 지사는 이튿날(17일) 큰 폭탄 4개를 자전거에 싣고 대구로 왔다. 품에는 자살용 소형 폭탄도 1개 들어 있었다. 그는 대구역 인근 덕흥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대구 중심부 덕흥여관으로 폭탄을 옮기다
여관에서 150m쯤 떨어진 지점에 조선은행 대구지점이 있었다(현 대구은행 중앙로지점 옆). 조선은행 대구지점은 경북도청(현 경상감영공원)과 불과 100m 거리였다. 또 도청 서쪽(현 대구근대역사관)에 식산은행 대구지점과 경북 경찰부도 있었다.
그 네 곳이 장 지사가 노리는 대상들이었다. 즉 조선은행 대구지점 주변은 정치, 경제, 정보통신이 밀집된 대구 최대 중심가였고, 장 지사가 덕흥여관을 숙소로 정한 것도 그 점을 감안해서였다. 정보 수집이 용이하고 이동 시간이 짧은 장점이 두드러졌다.
소설 형식으로 장진홍 지사 의거를 소개해보면
덕흥여관에 처음 들어갈 때 장진홍은 겨우 걷는 사람처럼 심하게 다리를 절뚝거렸다. 자전거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묶는 일도 간신히 해냈다. 사환 박노선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말을 걸었다.
“와 카심니까(왜 그러십니까)? 크게 다친 거 같은데 자정건 우째 타고 오싰능교(자전거는 어떻게 타고 오셨습니까)?”
“내가 선물을 꼭 보내야 할 고마운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들 이 인근에 있다오. 그래서 이렇게 자전거에 선물들을 싣고 왔는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을 기약해야지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심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이리 다쳤지요.”
장진홍이 서울말로 대답했다. 그렇게 다리를 전 것과 서울말을 쓴 것은 의거 후 일제 경찰의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된 언행이었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동원해야 하는데, 박노선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적당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이튿날(18일), 장진홍은 박노선에게 ‘심부름값’을 주면서 부탁했다.
“자고 나면 낫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다리가 퉁퉁 붓고 통증이 더 심해져서 아주 걷기가 힘들게 되었다오. 이것들이 모두 벌꿀상자인데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서에 순서대로 급히 배달을 좀 해 주시오.”
벌꿀 선물로 위장된 상자들 안에는 장진홍이 직접 제조한 시한폭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노선은 짭짤한 심부름값이 흐뭇해 부랴부랴 상자들을 챙겨들고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갔다. 박노선은 장진홍이 시킨 대로 국고계 주임 복지흥삼(福地興三)을 찾았다.
“선물 가꼬(가지고) 심부름 왔어에(왔어요), 주임님!”
박노선은 평소 안면이 있는 복지흥삼에게 벌꿀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때 복지흥삼 곁에 군인 출신 일본인 은행원 길촌결(吉村潔)이 앉아 있었다. 그가 군인 출신답게 화약 냄새를 맡았다. 길촌결이 재빨리 포장 끈을 풀었다. 상자 안에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으악!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복지흥삼이 비명을 질러댔다. 길촌결이 재빠르게 도화선을 잘랐다. 아직 불이 옮겨 붙지 않은 나머지 세 상자는 황급히 은행 앞뜰 자전거 주차장로 옮겨졌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달려왔고, 박노선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경찰은 주차장에 있는 폭탄 셋을 다시 한길로 내놓았다. 옮긴 지 1∼2분 만에 폭탄 셋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잇따라 폭발했다. 은행원,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박살이 나면서 파편이 대구역까지 날아갔다.
‘절반의 성공’에 머문 은행 폭탄 의거
폭파 의거는 ‘절반의 성공’에 멈추었지만 세상을 흔들었다. 일제 경찰은 1928년 1월 장진홍이 ‘범인’인 줄 파악하지 못한 채, 이정기 등 독립운동가 8명을 검거해 대구 형무소에 투옥했다. 이때 이원록(이육사)도 자신의 형·동생과 더불어 옥고를 겪었다. 일경은 악독한 고문 끝에 이들을 진범으로 조작해 재판에 회부했다.
의거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한탄한 장진홍 지사는 1927년 11월과 1928년 1월 안동 경찰서와 영천 경찰서 폭파를 계획했다. 그러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상태에서, 검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몸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새로운 의거를 도모하며 옮겨다닌 장진홍 지사
일본에서도 장진홍은 새로운 거사 준비에 골몰했다. 하지만 동생의 오사카 소재 안경점에서 마침내 검거되었다. 장 지사를 체포한 일제 경찰은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형사 최덕술은 1929년 2월 19일 의기양양하게 장 지사를 대구로 압송했다.
혹독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관련자들을 체포해 공적을 쌓으려는 조선인 형사들의 광분은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비인간적이었다. 하지만 장 지사는 오직 자신의 단독 의거라는 점만 되풀이해서 강조하며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다.
“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않을 것이다!”
여섯 달이나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장 지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1심 재판은 ‘사형’을 언도했다. 그 뒤 대구복심법원 재판도, 고등법원 상고 결과도 마찬가지로 ‘사형’이었다. 장 지사는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마다 재판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930년 7월 31일, 장 지사는 “일제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아니겠는가!” 하고 결심했다. 이윽고 그날 밤 11시경 장 지사가 자결·순국하였다.
후대인이 독립지사들을 제대로 섬기는 법
2003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터 앞 인도에 장진홍 기념물이 설치되었다. 그런가 하면, 동대구역 광장과 ‘대구 대표 도서관’ 뜰에 박정희 동상이 세워질 계획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지만, 후대인들이 독립지사들을 제대로 섬기는 첫 걸음은 반민족행위자들을 기리지 않는 지점에 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 안 된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기이한 모습을 장진홍 지사께서 혹 아시게 될까 두렵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