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경제국 독일이 21년 만에 처음으로 2년 연속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예고했다. 급변하는 산업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저렴한 러시아산 에너지와 중국 시장 확대에 의지한 제조업과 수출 위주의 경제가 한계에 봉착하면서 구조적 저성장의 굴레에 갇혔단 평가가 나온다.

9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이 따르면 독일 정부는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0.3%에서 마이너스(-) 0.2%로 하향 조정했다. 이대로라면 지난해 -0.3% 성장률을 기록한 독일은 2년 연속 경제가 뒷걸음치게 된다.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은 1990년 독일 통일 이후론 두 번째이자 2002~2003년 이후 처음이다. 당시 독일은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유럽의 병자’로 불렸다. 이후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총리의 노동 개혁으로 침체에서 탈출한 뒤 중국의 수요와 신흥시장 호황에 힘입어 화려하게 부활했으나, 경제 구조 개혁이 지연되고 미중 갈등과 전쟁 등으로 인한 지정학적 도전이 거세지면서 21년 만에 다시 병실로 돌아가게 됐단 평가다.

독일은 여전히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경제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독일 경제의 기반이던 에너지 집약적인 제조업이 직격탄을 맞았고 여전히 팬데믹 이전 생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독일 수출을 뒷받침하던 중국 시장은 경기 둔화로 내수 부진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경제 불확실성에 소비자 지출은 침체됐고 기업들은 투자에 나서지 않는다. 올라프 숄츠 연정의 내부 갈등과 극우와 극좌 세력의 부상이 겹치면서 경기 부양책을 위한 정치적 합의도 쉽지 않다.

여기에 독일 경제 주축인 자동차 산업은 전기차 전환을 선도하지 못한 채 도태될 위험에 처했다. 최근 BYD 같은 중국 기업들은 저렴한 전기차를 내세워 본토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독일 차를 위협하고 있다. 독일 명차 브랜드 BMW, 메르세데스, 포르쉐, 폭스바겐의 시가총액을 다 합쳐도 미국 테슬라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폭스바겐이 창사 이래 처음으로 독일 공장 폐쇄를 검토할 정도로 독일 자동차 업계의 위기감은 선명하다. 한때 독일의 강점이던 자동차 산업이 되레 독일 경제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단 경고가 나올 정도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경제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현재 상황에 대해 “만족스럽지 않다”면서도 “하지만 우리는 문제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내년엔 성장률이 1.1%로 플러스 전환한 뒤 2026년엔 1.6%까지 더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그도 에너지 안보 부족, 숙련 인력 부족, 인프라 투자 부족, 과도한 관료주의 같은 구조적 문제가 경제 성장을 저해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 독일과 유럽이 끼어있다며 지정학적 불확실성도 경제 활동에 부담이 되고 있다고 했다.

독일 안팎에선 독일이 과거의 성장 모델에 안주하면서 불황의 늪에 빠졌단 경고가 나온다. 영국 가디언의 경제 에디터 래리 엘리엇은 “독일은 한때 본받아야 할 경제 모델이었지만 수명이 다한 산업에 대한 의존으로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독일은 자신이 만든 성공의 희생양이 됐다”면서 “환경이 급변하는 걸 지켜보면서도 경제 모델을 바꿀 이유를 찾지 못했고 물리적, 인적, 디지털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했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독일에 당장 경제 개혁에 착수할 것을 조언한다. OECD의 알바로 산토스 페레이라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블룸버그TV 인터뷰를 통해 “독일은 가장 먼저 인프라, 특히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뒤처진 디지털 인프라를 개선해야 한다”면서 “경제 부문 전반에 걸쳐 경쟁 친화적인 환경을 만들고 장벽을 허물고 관료주의를 깨뜨려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