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평양의 중앙당학교에서 모스크바 유학을 준비하던 시기의 남경우. ©러시아사회정치사기록원
남경우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6·25전쟁 때 노동당 경남도당 위원장이라는 요직에 재임한 사람인데도 그랬다. 동지들도 그에 관해 아는 바가 적었다. 전쟁 시기에 경남 빨치산에 참가했던 김교영(1927~2021)은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본명이 아닐 것이라고 보았다. “‘남경우’를 뒤집어 읽으면 ‘경남’이 되듯 그 이름도 가명”이라고 이해했다.1
남경우, 너의 이름은…
남경우의 한자 표기도 들쭉날쭉하다. 문헌상으로 세 가지가 전한다. 1934년도 경성직업학교 입학생 명단에 실린 한자 성명은 남경우(南庚祐)였다. 1946년 철도 파업 때 ‘남조선철도종업원대우개선투쟁위원회’가 미군정 운수부장에게 보낸 ‘각서’에는 대표자 3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경우(南慶祐)라고 기재돼 있다. 뒷날 연구자 김남식은 그를 남경우(南庚宇)라고 표기했다. 아마도 언론 기사나 후대 연구자의 견해보다는 공식 문서에 적힌 성명이 실제에 가장 부합하리라고 본다. 경사 경(慶), 도울 우(祐) 자가 그의 이름일 것이다.
그는 1952년 1월18일 지리산 대성골에서 전사했다. 공군기 편대까지 동원한 대대적인 토벌전 때문이었다. 소이탄 공격으로 온 골짜기가 불바다로 변해버린 와중에서 경남 유격대는 거의 전멸했다. 사망자 중에는 남경우 위원장을 비롯한 경남도당 간부 14명이 포함돼 있었다.2
빨치산 참가자 이태의 전언에 따르면 남경우는 사망 당시 32살의 충청도 출신 청년이었는데, 모스크바 고급당학교를 나온 엘리트 당원으로 나이에 비해 이례적인 발탁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한다.3 어떤 사람이길래 젊은 나이에 그처럼 이례적인 발탁을 받았을까?
남경우가 1921년 12월20일생이니 향년이 32살이었다는 말은 맞는다. 한국식 세는나이로 치면 말이다. 하지만 충청도 출신은 아니었다. 남경우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출생지는 경기도였다. 출생 당시 행정 구역상으로 광주군 광주면 직리에서 태어났다. 해발고도 414m의 염장산을 뒷산으로 하는 산골이었다. 농토라고는 화전밖에 없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그는 식구 11명을 부양하는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이었다. 조부모, 모친, 어린 삼촌들, 어린 동생들이 아버지의 농업 노동에 의지해 근근이 생활했다. 극빈했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끼니를 차리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고 한다. 다행히 7살 때 형편이 약간이나마 폈다. 남한강 변에 위치한 들이 넓고 비옥한 여주군 대신면 율촌리로 온 가족이 이사했고, 그곳에서 농토를 넉넉히 얻어 소작농을 지을 수 있었다. 현지에 시집가 살던 대고모(아버지의 고모)가 주선한 덕분이었다.
어린 남경우는 운이 좋았다. 일본의 식민지 우민화 정책으로 조선인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17.2%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는데도4 그는 초등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새로 이사한 율촌리는 면사무소 소재지였고, 이사한 바로 그해에 대신보통학교가 개교했다. 집에서 8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학교가 들어선 것이다. 그는 1928년 봄 대신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남경우의 친필 필적과 서명. ©러시아사회정치사기록원
‘마소’처럼 10년 일하고도 셋방살이
소년 남경우는 향학열이 높았지만, 공장노동자의 길로 들어섰다. 14살의 나이였던 1934년 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에 입학했다. 1931년에 설립된 경성직업학교는 2년제 중등학교였다. 비싼 학비 탓에 다른 중등학교 입학은 꿈도 꿀 수 없던 남경우는 학비가 보통학교나 진배없는 그 학교를 선택했다. 학비가 낮은 이유가 있었다. 작품 전시회를 열어 학생들이 제작한 상품을 판매하고 그 수익금을 학교 경영에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직업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한 16살 남경우는 관례에 따라 취업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교장의 알선으로 1936년 4월1일 철도국 서울 철도공장 기관차 직장 견습 직공으로 취직하였다.”5 학교장의 알선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의 학교생활은 모범적이었던 것 같다.
이후 남경우는 10년 동안 줄곧 철도공장에서 일했다. 철도공장이란 당시 행정 구역상으로 한강통3정목(현 한강로3가)에 자리한 ‘철도국공장용산공작소’를 가리키는 약칭이었다. 26만㎡(7만8천여 평)의 드넓은 대지에 건물과 기계 투자액만도 500만원(현재 3천억~4천억원 상당)에 달했다. 종업원 수는 1500명이었다. 그들은 선반, 조립, 마감, 단련, 보일러 제작, 주물, 객차, 화차, 도색, 전기, 강판 등 11개 직장으로 나뉘어 배속됐다. 남경우는 기관차 수리공으로 일했다.
16살 남경우는 취업 덕분에 생활의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셋방이나마 독자 주거를 마련했다. 그러나 10년을 일해도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박봉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 짊어져야 했던 가족 부양의 짐 때문이기도 했다.
두 살, 네 살 아래의 두 동생 남장우와 남순우가 보통학교를 마치고 상경했다. 하나는 1936년에, 또 하나는 1938년에. 형은 두 동생을 거두었다. 한 칸 셋방에서 함께 지내며 각각 직업학교를 졸업시켰다.
20살 되던 1940년에는 결혼했다. 그러나 젊은 아내와 함께 두 아우를 데리고 한 칸 셋방에서 궁색한 살림을 계속해야 했다. 급기야 23살 되던 1943년에는 부양가족이 급증했다. 부친이 병사한 탓에 그가 부양하던 조부모, 계모, 계모 소생의 아우, 모두 4명이 그에게 의지하기 위해 상경했다. 그사이에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 두 아우를 공장 기숙사로 내보냈는데도 식구 7명이 한 칸 방에서 살아야 했다. 남경우는 늘 공장에서 자거나 귀가한 때는 마루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남경우가 일한 용산 철도공장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비밀결사의 무대이기도 했다. 1934년 4월에는 메이데이에 즈음해 격문 수천 장이 살포됐고, 1935년 8월에는 경기도경찰부 형사대가 철도공장에 출동해 작업 중이던 직공 3명을 검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남경우가 이러한 비밀결사나 노동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1945년 해방 이전에는 사회주의 운동에 별다른 관련을 맺지 않았다. 그의 ‘이력서’에 해방 이전의 운동 경력을 묻는 항목이 있다. 1945년 해방 전에 “해방운동과 지하운동에 참가하였는가”라는 문항이 그것이다. 그에 대해 남경우는 ‘없음’이라고 짧게 답했다.6 왜 그랬을까. 남경우는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남경우가 1936~1946년 10년 동안 근무하던 용산 철도공장 객차 직장의 내부 모습.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 기념엽서(1922년)
그의 내심은 “철도국에 매인 몸이 되어 마소와 같이 10여 년 일하면서”도 가난에 시달리고 셋방살이를 전전하는 것에 대해 ‘원망과 격분’을 느끼며 지내왔다. 그 때문에 해방 직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접하게 된 선배 노동자들의 언행에 깊은 감화를 받았다. 그의 마음은 결심으로 굳어졌다.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살고, 그것을 위하여 일하고, 또 그것을 위하여 죽겠다”고 맹세하기까지 했다.
해방 이후 노조와 공산당에 ‘투신’
남경우는 노동조합운동에 뛰어들었다. 해방된 지 두 달 만에 직장 내에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다. 1945년 10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철도노동조합 경성지부 서울기관구 분회를 결성하고 그 회장직에 취임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회주의 비밀결사에도 발을 내디뎠다. 1946년 1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근무처인 철도 기관구에 공산당 세포 단체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이 됐다. 당내 지위가 점차 올랐다. 그해 3월에는 철도구당 간부가 되고, 6월에는 철도구당 상임위원에 올랐다. 용산 철도공장 내부의 노동조합과 당조직 두 곳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철도부문 노동운동의 핵심부에 자리잡았다고 평할 수 있다.
대중운동의 선두에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처음 맞는 6.10 만세기념운동 때에는 한때 체포되기도 했다. 철도 노동자들을 동원하기 위해 연설하고 전단을 살포하다가 종로경찰서에 구금된 것이다. 정식 재판을 받고 다행히 무죄로 인정돼 2주일 만에 석방됐다.
그해 9월 인생의 큰 분기점이 되는 철도총파업의 선두에 섰다. 용산공장은 물론이고 운수부, 보건부, 전신구, 수색, 청량리, 부산 등 철도국 산하 각 공장과 직장에 고용된 1만5천 명의 노동자가 대우 개선을 내걸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쌀 배급량 증가, 임금 인상, 해고 감원 반대 등 경제적 요구 조건을 내건 투쟁이었다. 남경우는 ‘남조선철도종업원대우개선투쟁위원회’라는 임시 투쟁기구의 대표자 3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그는 대표자 3명 명의로 미군정 운수부장 앞으로 9월24일자 ‘파업 각서’를 발송했다. 전국적 대중투쟁의 현장 지도부 일원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남경우는 이로 인해 탄압을 받았다. 9월30일 체포됐고, 본정경찰서(서울 중부경찰서)에서 56일간 취조를 받았다. 이 기간에 갖은 고문이 자행됐다고 한다. 그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47년 6월16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에 즈음한 미군정의 유화 조치로 감형돼 출옥했다. 9개월 남짓한 고문과 투옥 경험은 그의 투지를 더욱 고조시켰다. 그는 직업 혁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가정을 갖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조부모와 어린 아우는 친척 집에 맡겼고, 6살짜리 어린 아들은 외가로 보냈다. 1945년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사망한 전처에 이어 재혼했던 새 아내는 자신의 뜻을 끝내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이혼했다.
남경우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연륜은 길지 않았다. 해방 직후에 불붙은 그의 운동 경력은 2년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1947년 11월, 그는 남로당의 미래를 짊어질 신진 간부로 지목됐다. 모스크바 유학 대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남경우는 그해 11월30일 월북했다. 평양 인근의 평원군 평원면 송석리에 있는 북로당 중앙당학교에 적을 두고서 모스크바 유학 예비과정의 학업에 종사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례적인 발탁을 받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출신 성분이 고려됐을 것이다. 그는 빈농 집안 태생이었다. 그는 철도공장에서만 10년 동안 근무한 기능직 공장노동자였다. 당원의 사회적 구성을 학생⋅지식층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층으로 옮기기로 한 것은 이미 1928년 12월 테제 이후로 당의 일관된 방침이었다.
용산 철도공장의 일부 외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 기념엽서(1922년)
철도노조에서 모스크바행 열차 ‘탑승’
당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헌신성이었다. 그는 국가의 기간산업 부문인 철도 노동조합운동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탄압을 두려워하지 않는 맹렬한 투지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직업 혁명가로 나아가려는 강렬한 내부 동력을 갖고 있었다. 남경우를 당의 미래 간부로 발탁한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모스크바 유학 중에 그가 거둔 학업 성적표가 남아 있다. 총 14개 과목 가운데 정치경제학 과목만 ‘미’였고 ‘우’가 6개, 나머지는 모두 ‘수’였다. 1950년 7월 작성된 니콜라예프 교수의 평가에 따르면, 남경우는 “학업에 매우 열성적이며 열심히 임하고 있고, 러시아어 학습에 커다란 성취를 거뒀다”고 한다.7
남경우가 자신의 정치적·이론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얼마나 성심껏 모스크바 유학 생활을 보냈는지 짐작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