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이 지면에서 주로 다루던 ‘서사’로 돌아가는 것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신이 났기 때문이다. 내가 신이 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의학 영역에서 서사, 조금 더 넓게는 문학을 살필 필요를 계속 이야기해 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문학과 의학이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런 건 취미활동이 아니냐며 백안시하던 교수님들한테 적어도 한마디 할 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분은 물으실 수도 있으리라. 노벨상 수상 소식 앞에서 문학에 괜히 숟가락을 얹으려는 것 아니냐고. ‘서사의학’이라고 하니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환자나 의료인의 ‘서사’를, 앓는 사람과 그를 고치려는 사람의 이야기를 살피는 것인 것 같은데 그걸 ‘문학’이랑 연결이 되긴 하나 궁금하실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조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사의학이라는 분야가 문학이랑은 별로 상관없지 않나?’라고 말씀하실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의학과 서사를 언급하며 국내에 소개된 책들, 예컨대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나 아서 클라인먼의 ‘우리의 아픔에는 서사가 있다’와 같은 유명 저자의 책들이 명확히 환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의학에 대한 분석과 대안을 내놓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자 이야기, 흔히 투병기라고 부르는 것들은 신변잡기의 글이지 진지한 수필이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다.

혼자 생각해 본 가상의 질문이긴 하지만, 심지어는 내가 번역했던 책(‘서사의학이란 무엇인가’)도 비슷하게 이해되었던 것 같다. 서사의학이란 의료인에게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주문하는 학문이자 운동이라고 어느 기자님께서 책을 소개하면서 말씀 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한다면 서사의학과 문학은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게 맞다.

여기까지 쓰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작업은 분명하다. 이 모두는 오해라고 설명하는 것. 서사의학이 다루는 것은 문학이다. 심지어 나는 그것이 문학에 접근하는 방법론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이 어색하게 들리시는 분들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 하나는 문학과 의학이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학과 의학 사이 어떻게 상관을 지을 수는 있다 쳐도, 의학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전혀 상상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은 구체적인 작품을 다루는 것보다 두 질문에 답을 해 보려 한다.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환자나 의사, 또는 병원이 등장하는 문학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의사가 주인공인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만 해도 그 수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문학과 의학의 상관을 고민하는가.

문학과 의학의 상관을 ‘의학을 다루는 문학’으로 풀어낸다면 위 말씀이 맞다. 하지만 그건 문학이 의학을 표상한 것일 뿐, 문학과 의학이 서로 상관이 있다고, 또는 연계성을 지닌다고 말할 부분은 아니다. 오히려 문학과 의학이 연계되어 있다는 말은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문학은 보통 지어낸 것이지만, 의학은 전적으로 사실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둘이 연계성을 지닌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과 의학의 소원함을 따지는 데 있어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문학은 (논픽션도 물론 있지만, 주로) 픽션이고 의학은 논픽션, 그것도 그 끝에 위치하는 것이라 서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전 문학은 전적으로 작가의 창조물로 여겨졌다. 막 신의 미몽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하던 계몽주의 시대 문학은 말 그대로 ‘천재’가 ‘우주의 계시’를 받아 ‘번개처럼’ 써 내려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문학 이론이 점차 확장, 발전해 나가면서 문학 또한 문화와 역사 위에서 만들어진 구축물임을 점차 인정하게 되었다. 작가는 이전 시대의 작가와 작품들의 영향을 받으며, 동시대의 작가들과 함께 호흡하는 한편, 자신이 남을 반복할까 두려워하며 글을 쓰는 이다. 외부와 무관하게 작가의 머릿속에서만 만들어진 ‘픽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픽션은 세상을 반영한다.

한편 논픽션은 애초에 꾸미지 않은 것, ‘사실’에 대한 기록을 가리킨다. 하지만 꾸미지 않은 글이 있을까. 나는 가장 쉬운 예로 다큐멘터리를 들곤 한다. 대표적인 논픽션 장르인 다큐멘터리는 기본적으로 사실에 대한 기록이며, 재연할지언정 무언가 창작된 내용을 넣진 않는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진실’일까. 감독은 사실을 취사선택하고 연결하며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다분히 자신의 의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다큐멘터리도 엄정하게 말한다면 꾸며진 것, 어느 정도 ‘창조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완벽히 창조된 것으로서의 픽션, 온전히 진실로서의 논픽션은 허구적 개념이다. 여기에 나는 의학적 접근에 대한 생각을 더한다.

의료진이 환자를 만나 이것저것 묻는다. 이때, 의료진은 환자의 말을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까. 사실에 관한 진술, 즉 진리로? 그렇지 않다. 그랬다면 의료진은 이런저런 검사를 할 필요가 없다. 의사로서 나는 환자를 볼 때,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잘 모르며 심지어 혼돈을 겪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환자는 자신의 불편과 아픔을 호소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다. 보통 환자가 일부러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니다. 본인도 기억이 왜곡되거나, 주관적인 해석을 강하게 부여하여 큰 일을 작게, 작은 일을 크게 생각한 탓이거나, 또는 그 자신의 경험과 신체적 특성으로 인하여 남과는 다른 방식으로 질병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환자는 의료인에게 ‘픽션’을 말한다.

정리하자. 문학은 생각보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의학은 생각보다 꾸며진 것, 만들어진 것을 다룰 일이 많다(무엇보다 환자와 의료인의 만남은 의학의 핵심이자 어찌 보면 모든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된 것을 다뤄 온 문학이 의학에 해줄 말이 있지 않을까. 반대로, 세상의 특별한 요소, 건강과 질병을 자기 것으로 품어온 의학이 문학에 전할 내용이 있지 않을까.

앞서 말한 것처럼, 환자의 말이 꾸며진 것이라면, 오로지 과학적 사실만을 다루고 생각해 온 의료인들이 환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리가 없다. 따라서 의료인들은 환자의 말을 분해하고 해체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재조립한다. 그것이 의료인이 쓰는 의무기록, 병원 차트다.

이런 병원의 기록은 매우 형식적이며, 주치의의 서명을 제외하면 누가 쓴 것인지 드러나지 않는 삼인칭의 객관적 형태를 유지한다. 그것은 의학적으로 필요한 사실만을 건조하게 나열한 정보이며, 따라서 누가 쓰더라도 같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

정말 그런가? 그런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차트는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 사안(현재 질병)과 관련한 내용을 어떻게 담을지, 심지어 어떤 내용이 중요한지는 기록자의 판단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학생이 쓴 차트는 훈련과 평가의 대상이지, 그것만으로 오롯이 환자 정보가 충분히 담긴 기록으로 삼기 어렵다.

전문의가 쓴 차트라 해도, 전문과에 따라(내과 의사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쓴 차트는 다르다), 그리고 그의 경력에 따라(오랫동안 대학병원에서 일한 의사와, 동네 병원에서 일한 의사의 차트는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 낫다는 것이 아니다.

차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어떤 관점으로 쓰였는지, 무엇이 포함되고 포함되지 않았는지, 그 형식을 주관하는 시공간적 특성은 무엇인지, 누구의 목소리가 강조되고 있는지, 그 목적과 효과는 무엇인지, 청중은 누구인지 등을 살펴보는 것은 차트를 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이해하는 기작이 된다. 문학을 살피는 방식을 훈련해 차트를 읽는 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아니면 다시, 환자의 말이다. 환자는 여러 상황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다. 그것은 상황 때문일 수도 있고, 가족 때문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정리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의학적 결정을 위해선 환자가 하지 못한 말이 반드시 필요하다. 무엇보다 좋은 결정은 후회를 남겨선 안 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결정을 내릴 때 감춰진 마음들은 드러나야 하고, 각 사람의 마음이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 결정인 경우도 있으니까.

여기에서 딜레마가 나타난다. 환자는 말할 수 없다(최소한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 말할 수 없는 마음들을 반영해야만 의학적 결정은 좋은 것, 선한 것이 된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다시 문학은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그려낸다. 글이나 사진, 더 나아가 영상도 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수단이 되긴 하지만, 문학만 한 것은 없다. 우리는 여러 사례, 그리고 인지과학의 연구를 통해 문학을 읽는 독자가 등장인물에 얼마나 큰 일체감을 느끼는지 배워 왔다. 심지어 그 일체감은 다분히 훈련되는 것이다. 문학에 능숙한 이는 등장인물의 마음을, 심지어 문학 속 ‘세계’의 마음을 자신의 방식으로 파악하는 이다.

그렇다면 말해지지 못한 환자의 마음을, 문학에 능숙한 이가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과도한 억측은 아닐 것이다.

서사의학이라는 분야는 환자의 기록을 살피긴 하지만, 그보다 문학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서사의학은 의학이 다분히 문학적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식이 의학에 많은 것을 줄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사의학은 문학을 다루며, 의료인과 환자가 문학 읽는 훈련을 하면 우리의 의료가 나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한마디 보탤 자격은 입증했을까. 이 정도면 서사의학을 하는 의료인으로서, 그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로서 나 또한 문학과 관련되어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괜찮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