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없었고, 유리천장은 있었다. 미국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은 또다시 이뤄지지 못했다. 선거운동 막판 ‘히든 해리스’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으나 뒷심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히든 트럼프’ ‘앵그리 트럼프’라고 부를 만한 표심이 더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히든 트럼프’와 ‘앵그리 트럼프’는 ‘트럼프냐, 해리스냐?’를 묻는 여론조사를 말도 안 되는 것이라 여기며 아예 응하지도 않고, 작금의 미국 물가와 경제 상황, 이민자들에게 화가 난 민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더 이상 ‘샤이 트럼프’가 아니다. ‘미국 우선주의’ 신봉자이자 대변자인 트럼프에게 압도적인 표를 몰아줬다. 트럼프는 20년 만에 전국 득표에서도, 선거인단 확보에서도 이긴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트럼프가 이번에 19세기 이후 처음으로 ‘징검다리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미국 유권자들의 정권심판 심리와 투표 성향의 근본적 변화를 꼽을 수 있다. 다른 나라 시각에서 보면 바이든 행정부가 코로나 팬데믹 위기를 나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인플레이션법이나 반도체법 등 굵직한 법안도 통과시켜 미국의 안정과 산업 부흥의 발판을 놓았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동맹국을 규합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물리적 현상 변경 시도에 대항하고 서방세계의 리더 역할도 충실히 했다. 재선 캠페인 과정에서 고령에다 흔한 말실수로 후보 사퇴에 이르렀지만 바이든의 업적은 사실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시각은 달랐다. 

이들에겐 피부에 와닿는 물가 상승이 미국의 세계적 리더 역할 회복보다 중요했다. 나 살기도 어려운데 늘어나는 이민자들에게까지 지급되는 바우처에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 국가부채는 현재 100일마다 1조 달러(약 1400조원)씩 늘어나고 있는데 우크라이나를 왜 지원해 주며, 동맹국 안보 위협에 대한 부담까지 왜 미국이 감당해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나토의 동맹국들은 대부분 잘사는 유럽 선진국이고, 세계 최대 해외 미군기지가 있는 한국이나 미7함대사령부가 기항하고 있는 일본도 선진국이다. 미국이 돕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는 나라들이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관성에 따라 미국에 기대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고 미국인들은 여기고 있다.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가 작년 10월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한이 한국을 침공할 경우 미군을 동원하는 데 찬성하느냐’는 질문에 찬성과 반대가 각각 50%, 49%로 집계됐다. 찬성이 1%포인트 많았지만 오차범위 내였고,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고 봐야 한다. 같은 문항에 대해 2022년 55%, 2021년 63%, 2020년 58% 찬성 비율을 보였던 것에 비춰보면 해가 갈수록 그 비율이 떨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같은 나토 동맹국을 침공할 경우 미군을 동원하는 데 찬성하느냐’는 질문에 해당 설문을 처음 실시한 2014년에는 44%만이 찬성했다. 2022년에는 56%, 2023년에는 57%가 찬성한 걸로 나타났다. 찬성 응답 비율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전폭적인 지원은 아닌 셈이다. 반면 ‘러시아가 독일과 같은 나토 동맹국을 침공할 경우 미군을 동원하는 데 찬성하느냐’는 질문에는 작년에 64%가 찬성했다. 나토 동맹국이라 할지라도 그 중요도에 따라 미국인들은 각기 다른 개입 의사를 밝힌 것이다. 하물며 나토 회원국이 아닌 우크라이나에는 어떠하겠는가. 올해 4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대해 ‘너무 많이 돕고 있다’가 36%, ‘충분히 돕고 있지 않다’가 36%로 동률을 기록했다. 2022년 4월 로이터통신·입소스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73%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찬성했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인들의 근본적인 투표 성향 변화도 트럼프 승리에 톡톡히 한몫했다. 이미 20여 년 전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토머스 프랭크는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책을 통해 미국 중하층 유권자들이 계급투표가 아닌 윤리투표 성향을 보이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민주당 표밭이던 캔자스 지역의 중하층 블루칼라들이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기 시작한 계기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이 책은 중하층 유권자들이 낙태 반대, 진화론 교육 반대, 동성애 반대, 줄기세포 연구 반대, 생태주의와 수돗물 불소화 반대 같은 공화당이 내세우는 윤리적 이데올로기 공세에 상당수 노출되며 계급투표가 아닌 윤리투표 성향으로 변화했다고 진단한다. 

엘리트 리버럴에 대한 반감도 영향

즉 공장 노동자와 배관공, 미용사 같은 보통 미국인들이 건강식 비건 식습관을 강조하고 와인과 라테를 즐기며 새로운 패션을 선도하는 명문대 출신의 거들먹거리는 리버럴 자유주의자들을 공동의 적으로 여기고, 소박하게 맥주를 마시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기를 소지하며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애국적이고 선한 미국인으로 자신들을 규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유세 현장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미국인 유권자들의 모습이 이미 20여 년 전 책에 그대로 소개되어 있다. 2016년과 올해 트럼프의 승리는 미국인들이 계급투표가 아닌 윤리투표 성향으로 상당 부분 변화한 정치적 지형을 반영한 산물이다. 

해리스가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갑자기 후보가 됐고 초반의 민주당 열세를 생각해 보면 나름 선전한 면도 많다. 하지만 민주당 진영 전체가 준비가 덜 됐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2020년 바이든에게 패배한 이후 트럼프의 재도전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그에 맞서기 위해 중도층 유권자는 물론 윤리투표 성향을 가진 공화당 지지자도 공략할 수 있는 인물을 키우고, 비전을 내놓는 준비를 해야만 했다. 트럼프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것은 고소득·고학력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데는 유효할 수 있겠으나, 총알도 피해 가는 트럼프를 신이 택한 사람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하지만 총알도 피해 가는 트럼프조차도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도록 한 미 연방수정헌법 제22조를 피해 갈 수는 없다. 4년 후 포스트 트럼프 시대에 현직 대통령이 후보로 나서지 않는 선거에서 민주당은 새로운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미국인들의 윤리투표 성향은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변화할 것인가. 트럼프 2기를 전망하기에도 벅찬데 벌써부터 더 많은 전망과 분석이 필요해 보이는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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