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반정부운동에서 1979년까지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반민주정권에 대한 대항뿐 아니라 친일정권에 대한 대항의 성격도 띠었다는 점이다. 1979년까지의 역대 정권들은 친일파가 국가운영의 주축을 이루거나(이승만 정권), 친일파가 국가지도자인 상태에서 이들이 국정에 많이 참여하는 정권(장면·박정희)이었다. 그래서 이때까지의 반정부운동에서는 그런 성격이 나타나게 됐다.
미군정기나 이승만정권 때는 친일파들이 경찰의 주축을 이룬 데 비해, 장면 정권과 박정희 정권 때는 이들이 군부를 주도했다. 5·16 쿠데타 1년 뒤인 1962년 8월 17일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고한 ‘한국 군부 내 파벌주의’라는 기밀전문은 친일파 군인들의 분포와 관련해 “공군은 일본파가 확실히 통제하고 있으며, 해병대는 함경-만주파가 지배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육군 내의 친일세력이 약해졌음을 전제한 뒤 친일파 정일권과 백선엽을 거명하면서 “육군 내의 전통적인 구 파벌들은 정일권의 개인적인 지도력하에 있는 함경-만주파의 장교들과 백선엽의 사적 지도력하에 조직된 평안도 출신이 다수인 장교들이 지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친일세력의 영향력은 박정희 정권이 전반기인 제3공화국에서 후반기인 제4공화국(유신체제)으로 넘어갈 때도 상당했다. 2016년에 <한국사학보> 제65호에 실린 허은 고려대 교수의 ‘냉전분단시대 대(對)유격대 국가의 등장’은 “1972년까지 국가체제의 재편을 주도한 이들이 만군 출신”이었다고 말한다. 만주국 군대에서 부역한 세력이 유신체제 등장에도 관여했던 것이다.
1980년 이후의 정권들도 친일청산을 훼방하고 대일 예속을 유지했다. 그러나 해방 이전에 친일파로 부역한 사람들이 국가지도자가 되거나 국정운영에 대거 참여하는 현상은 없었다.
좀더 활동할 수 있었던 친일파들이 1980년부터 국정운영에서 대거 사라진 데는 1979년 10월 16일 발생한 부마항쟁(부마민주항쟁)의 역할이 컸다. 사실상의 전제군주제인 유신체제에 타격을 가한 이 운동은 친일정권에 압력을 가해 이들을 내부적으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부마항쟁은 대통령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분열시켜 10·26을 촉발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군부 노장파와 소장파를 분열시켜 12·12쿠데타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부마항쟁은 친일파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친일 군인들을 역사무대에서 대거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서도 승승장구한 정래혁
그런데 이런 흐름의 영향을 덜 받은 친일 군인이 있다. 박정희 때인 1970년에 국방부장관이 되고 전두환 때인 1981년에 국회의장이 된 정래혁이 그 주인공이다. 이 친일파는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하에서도 승승장구했다. 위의 미국대사관 기밀문건은 친일 군인들의 일파인 일본파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들은 일본 점령의 수혜자들이었으며 그 부친이 일본 장교였거나(신응균·유재흥) 또는 일본 점령의 혜택을 받은 세력에 속했거나(이종찬), 아니면 매우 우수했기 때문에(정래혁), 일본은 이들이 일본군의 출세 코스를 누리도록 허용하였다.”
“1926년 1월 17일 전라남도 곡성에서 출생했다”로 시작하는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래혁 편은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한 그가 1942년부터 일본의 녹봉을 받은 사실을 알려준다. “1942년 4월 일본 육군예과사관학교에 입학해 1943년 12월 졸업했고, 그 뒤 1944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45년 6월 제58기로 졸업했다”고 설명한다.
정래혁은 16세 때 일본 육사 예비과정에 들어가고 18세 때 일본 육사에 입학해 1년 뒤 졸업했다. 1970년 3월 12일자 <동아일보> ‘인터뷰 정래혁 신임 국방장관’은 “광주서중 4학년 재학 중에 일본 육사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 해방된 해 6월에 우등으로 졸업”했다고 소개한다.
이 기사는 그가 일본 육사에 수석 입학했다고 언급했다. 전날 발행된 <경향신문> ‘정래혁 국방’은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설명했다. 그런 뒤 19세 때인 그해에 일본군 소위로 임관돼 2개월 뒤 해방을 맞이했다.
식민지 한국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압도적 다수의 한국인들을 무시하고 착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경찰과 더불어 일제 군대가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군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도의 식민지배기구였고, 또한 아시아 민중을 학살한 침략주의 기구였다.
정래혁은 그런 기구의 간부를 지냈기 때문에, 부역 기간의 장단에 관계없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부사관이나 사병 출신이라면 구체적인 친일행위의 경중을 따지겠지만, 위관급 장교를 지냈기 때문에 그 지위만으로 친일파로 규정됐다. 수십 명을 지휘하는 청년 장교가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이나 총리보다 훨씬 위협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을 억압하는 군대에서 장교를 지낸 사실을 근거로 친일파로 규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방 뒤 정래혁은 미군정 사관학교인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졸업하고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했다. 그런데 일본은 그의 우수성을 인정한 데 비해, 미군정은 그렇지 않았다. “미군 고문과의 갈등으로 전역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그런 뒤 경찰에 투신해 경찰학교에서 경위급 교관요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1948년 정부수립 뒤에 재차 생도의 길을 걸었다. 광주서중과 일본 육사에서 우수하다는 평을 들었던 그가 해방 직후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더니 정부수립 직후에는 육군사관학교 특임 제7기로 입학했다. 1950년에 사단 참모장이 되고 1959년에 육군 군수참모차장이 된다. 4·19혁명이 있었던 1960년에는 소장 계급장을 달게 된다.
일본 육사 1년 선배가 일으킨 1961년 5·16 쿠데타 뒤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이 되고 상공부장관을 겸직했다. 1966년에 육사 교장, 1966년에 제2군 사령관이 됐고, 1968년에 중장으로 예편한 뒤 1970년에 국방부장관이 됐다. 친일파 대통령과 친일파 국방부장관이 국방을 이끌었던 것이다. 유신체제하인 1973년부터는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고 제9대·제10대 국회의원이 됐다.
제10대 총선은 1978년에 있었다. 이듬해에 부마항쟁이 있고 10·26사태와 12·12쿠데타가 있었으므로 이 친일파의 정치적 영향력은 1979년 이후의 대격변 때 내리막길을 걷기가 쉬웠다.
하지만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전두환이 국회를 마비시키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출범시킨 지 이틀 뒤인 1980년 10월 29일 이 기구 부의장이 됐다. 이듬해에는 제11대 국회의원이 되고 국회의장이 됐다. 1983년에는 전두환을 대리해 집권당을 관리하는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위원이 됐다.
이렇게 1979년 이후의 대격변을 무사히 넘어가 전두환 정권에서도 승승장구하던 그는 58세 때인 1984년 6월 13일에 터진 ‘정래혁 사건’과 함께 정치무대에서 갑작스레 하차하게 됐다. 그의 부정축재액이 빌딩 4동과 주택 5채를 포함해 178억 원이 넘는다는 투서가 민정당 등에 들어간 결과였다.
그날 발행된 <경향신문> 10면 우중간은 5월말 현재의 짜장면 평균 값이 625원이라는 서울시의 물가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지금의 짜장면 값이 이때보다 10배가 넘는 점을 감안하면, 정래혁이 부정축재했다는 178억 원의 현재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정래혁은 1942년 4월부터 1945년 6월까지 일본 예과사관학교와 사관학교의 지원으로 공부했다. 그 뒤 2개월간 일본 장교로 복무했다. 이 3년 4개월간 발생한 친일 수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178억 원을 부정축재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1984년 6월 30일자 <경향신문> 10면 중하단은 ‘제보자에 대한 명예훼손죄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방침과 더불어 의원직을 사퇴하고 재산을 환원한다는 그의 약속을 보도했다. 1945년·1960년·1979년의 대격변을 무사히 피해 갔던 친일파 정래혁은 대격변이 없었던 1984년에 자신의 이름이 걸린 정래혁 사건을 감당하지 못하고 역사무대에서 사실상 퇴장했다. 2022년 5월 17일 9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