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0월 10일 김구하(金龜河) 지사가 타계했다. 본적이 경북 선산군 선산면(현 구미시) 교동 858번지로, 1924년 8월 22일 출생했으니 향년 61세였다. 강제징병을 거부하다가 피체되어 투옥과 고문을 겪었다.

1938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점원·공장 공원·전차 차장 등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세이던 1943년 4월 선산군 농회 지도원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노예로 살 수 없을 만큼 그의 성정은 곧고 강직했다.

1944년 8월 서울로 가는 북행열차에서 “태평양 전쟁은 한 달 뒤인 9월까지 미국을 격멸시키지 못하면 일본은 승리하지 못한다” 등의 발언을 하면서 조선총독부의 강제 공출과 조선인 청년에 대한 징병 등을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9월 7일에는 평양 제44부대 입대 명령 현역병 증서 교부를 거부하고 만주로 도피하였다. 결국 피체된 그는 ‘조선 임시 보안령, 육해군 형법, 병역법 위반’ 혐의로 1945년 4월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그나마 다행은 기결수로 투옥되고 약 넉 달 후 나라가 독립을 되찾음으로써 풀려난 일이었다. 하지만 불행은 그가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표현)”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이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난 1950년 10월 10일 서오룡(徐五龍)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본적이 경북 달성군 성북면(현 대구시 북구) 산격동 1057번지로, 1911년 6월 1일 출생했으니 향년 39세에 불과했다.

대구상업학교 학생이던 1930년 10월 이래 일본인 사사키(左左木隆) 등과 함께 사회과학 독서회를 조직해 활동에 돌입했다. 그해 12월 하순쯤 대구 김홍렬의 집에서 김동욱·권영달·이동우 그리고 사사키와 또 다른 일본인 세토(瀨戶口茂)와 함께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 조선 제1호 지국’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 비밀결사에는 대구상업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다수 참여하였고, 사사키가 책임자를 맡았다. 1929년 설립된 일본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의 ‘조선지부’ 성격을 띤 이 단체는 동 기관의 기관지 <프롤레타리아과학>을 연구·보급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대구상업학교 학생 서상조·권태우·정학진 등을 참여시켜 조직 확대를 꾀했다.

조직이 커지자 1931년 1월 이래 격문 ‘빵을 위해 투쟁하자’, ‘자본가를 처단하자’ 등을 제작해 대구 시내에 배포하고, 대구상업학교 학생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결국 1월 28일 서오룡 지사는 5학년생으로서 1학년생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사사키는 퇴학당했다.

그 후에도 이들은 5월부터 9월까지 대구상업학교 내 독서회를 조직해 10여 차례 회합을 했다. 또 10월부터 학교·농촌·공장에 서클을 조직하고 동지 100여 명을 규합했다. 서 지사는 정학진과 함께 학생서클을 책임 맡아 활동하였다.

1931년 7월 대구상업학교 졸업 후 “만보산 사건에 대한 조선인의 반항심을 일본 제국주의로 향하게 하여 그 본질을 폭로하자!” 등을 내용으로 한 반일 격문을 제작해 여러 곳에 배포했다.

8월에도 산격동 교회 야학교사 서오덕 등에게 ‘만보산 사건’을 설명했다. 그는 “일본이 의도적으로 만주 만보산 일대에서 한국 농민과 중국 농민 사이에 충돌을 일으켰는데 공연히 국내에서 중국인에 대한 보복 행위가 일어났다. 이는 중국·조선·일본 피압박 민중의 공동전선을 파괴하려는 일본의 시도에 우리가 말려든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 9월 28일, 11월 27일에도 교회와 야학 학생들을 상대로 “우리 한국인의 쌀 소비량은 1년에 1인당 평균치 7말 내외로 매년 감소하고 있는 반면, 일본인의 쌀 소비량은 1섬 이상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이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착취의 결과”라는 등의 내용을 설명해 항일 감정을 북돋우었다.

12월 4일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등 학교 내와 대구의 일본군 제80연대 등에 반전·반제 격문을 배포한 일로 피체되었다. 이듬해(1932년) 1월 23일 검찰로 송치되었고, 거의 1년을 미결수로서 고문과 투옥에 시달린 끝에 12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1차 투옥과 출옥 후에도 서오룡 지사는 1936년 2월 항일운동 동지 정수기 지사의 장례를 동지장(同志葬)으로 치른 일로 정운해·이동우 등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또 체포되었다. 그나마 다행은 이번에는 3개월 만에 풀려난 일이었다. 하지만 불행은 그가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표현)”로 분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