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대담은 성공회대 학생모임 ‘국경없는민주주의학교’가 기획하고 박은홍 성공회대 교수가 진행했다. 대담 일시: 2024년 9월 25일 방콕

박은홍 교수: 당신은 국왕모독죄 혐의로 7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태국 사회의 어떤 변화를 원하는가?

솜욧 대표: 왕실 개혁이 필요하다. 왕실에 대해서 국민들이 더 자유롭게 의견을 표할 수 있도록 국왕 모독죄와 같은 장애물이 되는 법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고,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개혁해야 한다. 특히 판사나 재판관을 임명하는 방식이나, 군인과 군대에 관련된 개혁도 필요하다.

박은홍 교수: 당신은 혹뚤라 직후 고등학생이란 어린 나이에 정글에 들어가 태국 공산당(CPT)에 협력한 것으로 안다.

솜욧 대표: 1973년에서 1975년 사이 사회주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컸다. 당시 군부독재 치하에서 국민과 대학생들에 대한 탄압이 컸다. 결국 대학생들이 많이 죽은 이른바 ‘혹뚤라’ 사건을 계기로 해서 1976년 타이 공산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또한 1970년대 말은 공산주의에 대한 매력이 퇴조하면서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태국공산당(CPT)에서 나와서 정치에 참여하거나 시민운동을 하는 그런 변화가 있었다.

박은홍 교수: 그러면 누가 CPT를 소개해 줬는지 궁금하다.

솜욧 대표: 그때 당시에 활동가로 있던 대학생 선배들이 소개를 해주었다. 고등학교 3년 때 입당하고서는 정치에 관한 이론이나 수업을 들었고, 무기 다루는 법도 배웠다.

박은홍 교수: 그러면 무기 다루는 방법을 어디에서 배웠나?

솜욧 대표: 라오스 쪽이었다. 근처 군부대에서 무기를 훔쳐 오기도 했다. 보통은 러시아에서 가져온 총기였다. 그때 당시에 러시아에서 활동 중인 태국인 코뮤니스트 동지들이 있어서 그쪽에서 무기를 들여왔다

솜욧 대표: 그때 군부독재가 먼저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숲속으로 도망쳐서 코뮤니스트들을 만났다. 당시 대학생들이 반정부 활동과 함께, 미군에 대항하는 그런 흐름이 있었다. 주로 지방이나 시골의 산이나 숲속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물류를 옮기는 일도 있었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일, 집안일, 전투, 훈련 등등 여러 가지 활동들이 있었다. 각자 책임을 나눠서 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됐다.

박은홍 교수: 당시 왕실이 없는 사회를 대안 사회로 배웠는가?

솜욧 대표: 공산주의 이론은 일단 왕실이 없는 사회를 지향했다. 그러나 미군이 베트남 전쟁 때문에 들어와 있었는데 그들을 태국 땅에서 쫓아내는 게 태국 공산당 CPT가 싸우는 근본적인 목적이었다.

박은홍 교수: 그 비슷한 시기에 캄보디아에 크메르루주가 공산혁명에 성공하고, 노동자나 농민을 위한 세상을 만든다고 하면서 수백만 명을 죽인 소위 ‘킬링필드’라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이에 관한 정보를 접했는가?

솜욧 대표: 접했다. 당시 캄보디아가 행한 방식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동시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죽인 사람의 수가 더 많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