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은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발생했다. 사건 초기에 이승만 정권은 사안의 성격과 봉기 총책임자를 규정하는 일에서 거듭거듭 혼선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가가 총책임자로 몰려 희생을 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분의 독립운동을 단 한 번도 인정해 준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분을 여순사건 총책임자로는 잠시 인정했다. 이 ‘잠시 인정’ 때문에 본인이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쓰고 희생을 당해야 했다.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5대 일간지 중 하나인 서울 소공동 <국제신문>의 그달 22일 자 보도에 따르면, 이범석 총리는 21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봉기군인 제14연대의 직전 연대장이 공산주의자 오동기였다면서 이렇게 발표했다.
“오동기는 여수에 가서 소위(所謂) 군대에서 행하고 있는 하사관 훈련의 기회를 포착하여 젊고도 단순한 하사관들을 선동하여 주의(主義)를 선전하는 일방, 극우진영 즉 국내에서 결합된 수많은 정객과 연결을 가지고 노국(露國) 10월혁명기념일 전후를 계기로 전국적인 반란을 책동한 것이다.”
극우의 의미가 우리 시대와 다르게 사용됐음을 보여주는 이 기사는 사건 발생 직후의 이승만 정권이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전에 계획한 반란으로 규정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10월 19일 오전 7시에 육군본부로부터 제주 4·3 진압명령을 받은 장병들 중에서 약 2000명이 명령을 거부하면서 발생했다. 그렇지만 이범석 총리는 그레고리력에 따르면 11월 6일이고 러시아력에 따르면 10월 24일인 러시아혁명 기념일에 즈음해 공산주의자들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오동기는 7월 18일에 연대장으로 부임했지만, 이 사건 당시에는 감옥에 있었다. 미군정 경무국 수사과장이었다가 1946년 대구 10월사건(10월항쟁) 때 ‘이 사건은 불순세력의 준동이 아니라 친일청산이 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했다가 해임된 독립운동가 최능진 등과 함께 역모사건에 휘말려 있었다.
최능진은 1948년 5·10 총선 당시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단독 출마해 무투표로 ‘고고하게’ 당선되고자 했던 이승만의 의도를 무너트리고자 출마를 시도했다. 그랬다가 선관위의 비협조와 서북청년단의 방해로 후보자 등록에 실패했다. 그런 뒤에 벌어진 것이 최능진이 오동기 등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는 혁명의용군 사건이다.
여순사건 보름 전에 발행된 10월 5일 자 <경향신문> ‘정부 파괴 혐의’는 최능진이 그달 1일 체포된 소식을 전하면서 “체포 이유는 작년 11월경부터 국군 소령 오동기 등과 공모하여 국방군 속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현 정부를 붕괘시키려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오동기는 9월 28일에 소환을 당하고 10월 1일에 구속심문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 놓인 오동기가 여순사건의 주역으로 포장됐던 것이다.
그랬다가 25일에는 14연대의 김지회 중위가 총책임자로 지목됐다. 2013년에 <전북사학> 제43호에 실린 역사학자 주철희의 논문 ‘여순사건 주도 인물에 관한 연구’는 그날 김백일 전투사령관이 사건 진상을 발표한 일을 언급하면서 “김백일은 반란의 주도 인물로 제14연대 소속 김지회 중위를 적군의 수괴로 지목하였다”고 설명했다.
김지회는 나중에는 훨씬 더 부각됐지만, 이 시점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다음날 나온 또 다른 발표에 의해 김지회는 잠잠해지고, 뜻밖에도 민간인인 독립운동가가 사건의 주역으로 급부상했다. 송욱 여수여중학교 교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봉기군이 여수를 완전히 빼앗긴 날에 발행된 10월 27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정일권 대령은 26일 기자회견에서 “반란군에 의하야 감금 중이든 여수 련대장 박승훈 중령은 호기를 어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야 작일(昨日) 목포에 도착하야 반란 당시의 실정을 보고”했다면서 오동기의 후임인 박승훈의 진술을 근거로 이렇게 발표했다.
“여수폭동 발생 시의 실정은 제14련대 내 반란자는 병영에서, 일부 경찰 급(及) 청년단은 경찰서 급 시내에서 동시 계획적으로 폭동을 이르켯음. 여수 총지휘 책임자는 여수여자중학교장이라 한다.”
제14연대 장병들은 병영에서, 여수 현지의 경찰 및 청년들은 경찰서 및 시내에서 동시에 봉기했다면서 여수여자중학교장 송욱이 총책임자라고 알리는 발표였다. 교장 선생님이 시민군뿐 아니라 정부군까지 총지휘했다는 자연스럽지 않은 내용이 발표됐던 것이다.
사건 발생 이튿날인 10월 20일, 여수 중앙동 광장에서 여수군민 4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여수인민위원회가 구성되고 6인 의장단이 선출됐다. 이때 독립운동가 박창래·이용기·박채영·유목윤과 함께 공동의장으로 추대된 인물이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는 33세의 송욱 교장이다.
송욱은 월간 <말>지가 창간 8주년 기념으로 실시한 제2회 5000만 원 고료 논픽션 공모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응모작의 주인공이다. 응모작의 저자는 1930년 나주에서 출생하고 순천중학교를 졸업한 뒤 여수동국민학교에서 교직원으로 재직한 다음에 농사일을 하면서 여순사건을 파헤친 반충남이다. 반충남은 ‘여수 14연대 반란과 송욱 교장'(<말> 1993년 6월호)이라는 응모작에서 송욱의 이력을 이렇게 서술한다.
“송욱은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일정 때 이북의 오산고보와 더불어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쌍벽을 이루던 고창고보를 거쳐 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을 졸업하고 서울의 상명여학교(상명여대의 전신)에서 교편을 잡다가 일제말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을 맞았다.”
2004년에 강정구·서중석 교수 등의 심사로 성균관대에서 통과된 김득중 박사학위논문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도 1948년 당시의 <세계일보> 및 <동광신문> 보도를 근거로 송욱이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된 사실과 그로 인해 8·15 광복을 감옥에서 맞이한 사실을 기술한다. 이런 사실들은 송욱이 독립운동가였음을 알려주는 표지다.
송욱은 10월 20일 민중대회에서 공동의장으로 선출됐다. 그가 이틀 뒤 대중 강연회에 연사로 나온다는 포스터도 거리에 부착됐다. 김득중 논문은 “여수인민위원회는 벽지 광고를 통해 이용기와 송욱이 강연회에 연사로 나온다고 광고했다”고 말한다. 봉기군에 구금됐다가 풀려난 박승훈의 진술과 더불어 이런 상황들은 송욱이 총지휘자라는 발표에 힘을 실어줬다.
그에 더해, 여수·순천의 중학생들이 봉기에 대거 가담한 일은 존경받는 교장인 송욱이 배후에 있다는 발표에 더욱 더 신빙성을 부여했다. 김득중 논문에 인용된 국회 속기록 제1회 제90호에 따르면, 이범석 총리의 국회 연설에서 이런 발언이 나왔다.
“이번에 기가 맥힌 것은 교육진영 즉 여수·순천의 중학생 놈들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16, 17세 된 놈들이 수류탄을 들고 돌격하고 고식(古式)총을 들고 사격하는데, 이것이 대항력이 제일 강하여 열광적이었다고 그래요. 여기에 교수놈들이 영도하고 여수의 반란군이 민중을 총연합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은 여수여중학교의 교장이던 자이고.”
송욱이 강연을 한다는 포스터가 거리에 나붙었지만, 그는 강연 제안을 거절했다. “그 뒤 그는 외출도 하지 않았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실상은 총지휘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진압군이 여수에 진입한 뒤 자신은 무관하다는 점을 해명하고자 진압군사령부를 찾아갔다가 그 길로 체포돼 대구로 이송된 뒤 처형됐다.
송욱을 총책임자로 지목했던 이승만 정권은 다음에는 김지회 중위를 부각시켰다가 나중에는 지창수 상사를 부각시켰다. 송욱이 책임자가 아니었음을 이승만 정권도 알게 됐던 것이다. 존경받는 교육자로 살던 독립운동가가 이승만 정권이 빚은 혼선으로 인해 뜻밖의 희생을 당했던 것이다.
송욱의 희생은 이승만 정권을 비롯한 역대 반공정권들이 감춘 여순사건의 진실 한 가지를 드러낸다. 이승만 정권이 잠시나마 그를 총책임자로 오인한 것은 제14연대 장병뿐 아니라 여수·순천 및 이웃 지역 주민과 학생들도 대거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존경받는 교육자인 그가 봉기 책임자로 손쉽게 오인됐다.
여수·순천과 이웃 주민들이 대거 참여한 것은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라는 이승만정권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공감했기 때문이다. 분단정부 수립에 반대해 항쟁하는 제주도민들을 진압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이 같은 공감대가 이 지역들에서만 형성됐을 리는 없다. 한국 국민들의 총의가 여수·순천과 이웃 주민들의 궐기를 통해 반영됐다고 봐야 이치적이다.
이는 1948년 10월 19일 아침에 제주 진압명령을 내린 쪽과 그 명령을 거부한 쪽 중에서 어느 쪽이 반군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와 더불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가 과연 공정한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독립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군사반란의 수괴로 몰아 살해했으니, 대한민국이 그를 한 번만 죽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