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0일 권중혁(權重爀) 지사가 타계했다. 1921년 12월 18일 경상북도 영일군 죽장면(현재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340번지에서 출생했으니 향년 102세였다. 지사는 대구 마지막 생존 독립운동가였다. 자택에서 면담을 하고, 거실에 걸려 있던 훈장을 감격에 겨워 바라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권중혁 지사의 출생지 죽장면 입암리는 구한말 산남의진의 치열한 전투 현장이다. 지사가 태어나기 14년 전 그의 고향마을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본다. 지사는 어릴 적에 어른들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까? 고향 산천을 물들인 의병 정신의 붉은 피가 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소설 형식으로 짚어본다.
1907년 10월 6일이다. 척후병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산남의진 대장 정용기는 영장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이 신시(오후 4시 전후)다. 왜적은 행군 속도로 보아 오늘밤 입암 마을에서 유숙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미리 매복해 있다가 전격적으로 야습하여 놈들을 일거에 척살한다.”
아픈 몸을 무릅쓰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지만, 대장의 음성은 어쩐지 선이 가늘었다. 장수들은 공연히 처연한 기분에 빠져들어 대장을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사방에는 어느덧 어스름이 깃들었다. 산골이라 중추의 밤공기가 더욱 차가웠다.
“후봉장은 군사 서른 명을 이끌고 입암서원 터 뒤의 송내마을에 매복해 있으라. 적이 가사천을 따라 내려올 터인즉 그 뒤를 밟아 입암마을 입구까지 전진하라. 우포장은 입암마을이 바라보이는 자호천 건너편에 잠복해 있으라. 연습장은 입암마을에서 봉화봉으로 오르는 길목의 평지마을에 매복하라. 적이 입암마을에 완전히 들어와 군장을 풀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기다리라.”
세 장수가 결연한 낯빛과 음성으로 힘차게 “옛!” 하고 대답한다. 의병대장이 다시 말을 잇는다.
“나도 곧 뒤따라 군사 100여 명과 함께 명미마을 쪽으로 갈 것이다. 명미마을이 입암마을 북쪽이니 우리는 사방에서 물샐틈없이 적을 포위하게 된다. 내가 총을 쏘아 공격 개시 시점을 알리면 그때 모두들 한꺼번에 적을 들이치라. 우리가 사방을 막고 있으니 도망치는 적병들도 모두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밤이 왔다. 어둠과 함께 적병 수십 명이 청송 쪽에서 가사천 물길을 따라 입암서원 아래로 왔다. 후봉장 이세기는 적을 놓칠세라 잽싸게 따라붙었다. 그것이 첫 번째 화근이었다.
그 수십 명은 적의 본대가 아니라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인 척후병들이었다. 적 척후병들의 후미에 따라붙은 이세기의 의군은 저절로 적의 본대 앞에 들어가게 되었다. 스스로 호랑이 아가리에 뛰어든 꼴이었다. 게다가 그 착각은 적의 세를 과소평가하는 우를 낳았다.
이세기는 대장의 명령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저 정도 적이라면 우리 전군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 만약에 적이 입암에 유숙하지 않고 그냥 남하해버리면 어쩔 텐가!’라고 생각한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담대하게 병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총을 쏴라! 놈들이 보일 때 어서 총을 쏴!”
탕! 타탕!! 갑자기 총소리가 들려오자 우재룡과 김일언의 부대는 총공격이 시작된 것으로 오인했다. 우재룡은 평지마을에서 내려와, 김일언은 자호천을 건너와 입암마을로 들어섰다. 그런데 일본군 척후병들은 자취도 없었다.
상황이 끝난 줄 오인한 의진군은 입암서원 아래의 선바위 물가 주막에 모여 무용담을 펼치며 쉬었다. 그때 일본군 본대가 들이닥쳤다. 작전 계획과 정반대로, 오히려 아군이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총탄 날아가는 불빛이 어둠의 마을을 덮었다. 예상하지 못한 적의 포위 공격에 놀란 아군 병시들은 화급한 나머지 마구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제 막 공격 채비를 하고 있던 정용기의 본대와 명미마을 들머리에서 마주쳤다. 시커먼 무리들이 달려들자 적병으로 여겨 총격을 가하려던 의진 본군은 그것이 아군 병사들인 줄 알고는 기겁을 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정용기가 물었다. 미처 누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적의 총알이 아군을 향해 쏟아졌다. 모두들 허둥대며 땅바닥에 몸을 눕히기 바빴다. 이미 적탄에 맞아 주검으로 넘어진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정용기도 왼쪽 가슴팍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적은 가사천과 자호천 물속에 불쑥불쑥 솟은 거대 바위들 뒤에 몸을 숨긴 채 사격을 가해왔다. 아군은 평지에 노출된 신세였다. 또 다른 화근도 있었다. 아군은 흰옷 차림이었다. 달빛도 거의 없는 그믐밤이었지만, 그래도 희끗희끗한 노출은 검은 옷에 비해 훨씬 심했다.
“모두 보현산으로 철수하라!”
정용기 대장이 간신히 비명을 토했다. 우재룡이 대장을 들쳐 업고 뛰었다. 아군은 보현산으로 올라가는 양지마을에 당도한 뒤에야 숨을 고르며 잠시 군을 점검할 수 있었다.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이 전사했고, 병사들도 15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직 정용기 대장은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렵고 가파른 고비였다. 오랜 벗인 이한구와 손영각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자신의 고향과 인근인 신령 출신 의병장 권규섭도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채 정용기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장! 대자앙~!”
장졸들의 애타는 울부짖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용기는 자신을 부둥켜안은 채 통곡만 되풀이하고 있는 우재룡을 그윽이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우재룡은 그렇게 의형을 잃고 말았다. 정용기는 말이 없고, 우재룡의 뜨거운 울음소리만 보현산 자락을 메아리쳤다.
권중혁은 1944년 서울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재학 중이었다.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23년 내내 산남의진의 핏빛 역사를 들으면서 자란 그에게 일제가 강제징용 명령을 내렸다. 산남의진이 큰 피해를 입었던 입암 전투는 권중혁 지사 출생 불과 14년 전 일이었다. 아직도 일제의 총소리가 생생했다. 그가 순순히 끌려갈 리 만무했다.
당시 일제는 전쟁에 광분해 이른바 ‘조선인 학도(朝鮮人學徒)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陸軍特別支援兵制度)’란 명목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징집해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학병은 명목상으로는 지원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제 징병이었다. 권중혁 학생도 1944년 1월 20일 일본군 ‘대구 24부대(대구 80연대)’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었다.
전쟁에 광분한 일제, 조선 청년들을 강제 징집
대구 24부대에 모집된 600여 학병들은 대체로 경상도 출신이었는데, 입대한 지 10여 일 후 3대대 3중대 소속 27명만 남기고 중국으로 보내졌다. 27명의 일원으로 잔류하게 된 권중혁은 메이지학원(明治學園) 김이현· 연희전문 문한우·주오대학(中央大學) 출신 권혁조·불교전문학교 권태용 등과 함께 탈출을 계획했다.
이들은 탄약고부터 먼저 폭파하고 무기를 탈취할 것, 독극물로 일본군을 몰살시킬 것, 그리고 집단 탈출 후 국외로 나가 독립투쟁 대열에 참가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맨손뿐인 학병 몇이 그같은 무력항쟁 및 독살 계획을 실행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다.
군부대 안에서 반란을 도모하다가 집단 탈출
결국 이들은 일단 집단 탈출부터 하기로 했다. 이윽고 8월 8일 거사일이 왔다. 6명의 학병들은 하수구를 통해 24부대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불침번 보초병 허상도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이들은 우선 가까운 팔공산으로 숨었다. 학병의 수가 줄어든 사실을 확인한 일제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좁혀 들어오는 포위망을 벗어나 어떻게든 만주로 망명해야 한다면서 학병들은 서로를 독려했다. 함께 다니면 한꺼번에 붙잡힐 우려가 있으니 뿔뿔이 흩어져서 압록강을 넘기로 했다. 하지만 팔공산에서 내려와 서울로 향하던 문한우와 권혁조는 안동역에서 체포되고, 권중혁도 권태용과 함께 영천 신녕 뒷산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안동역에서 그리고 영천 신령에서 피체
대구 계성학교 출신의 김이현만 무사히 중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조국 독립을 맞았다. 하지만 피체된 다른 학병 동지들은 붙잡힌 순간부터 석 달 동안 온갖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탈출 당일 보초병 허상도가 눈감아 주었다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을 만큼 무자비하게 당했다.
이윽고 이들은 12월 15일 일본군 임시군법회의에서 징역 4년을 언도받았다. 일제는 학병들을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육군 형무소까지 끌고 갔다. 그곳에서도 악랄한 고문은 끝없이 진행되었다. 그나마 다행은 8개월 뒤 조국이 독립을 되찾아 출옥하게 된 일이었다.
권중혁 지사는 국가보훈부 공훈록 ‘유공자 정보’에 “1921. 12. 18. – 2023. 10. 10.”으로 기재돼 있다. 그런데 같은 공훈록 ‘한국독립운동 인물사전’에는 “1921. 12. 18. – 생존”으로 나온다. 아,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 전, 대구 달서구 진천동 자택에서 만나뵀을 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용기 의병대장처럼 권중혁 지사께서도 아무 말씀을 하지 못하셨는데…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