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에게 축하를 보냅니다. 그의 직무에 있어 큰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합니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지난 6일(현지시간). 챗GPT 개발사 오픈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가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 계정에 남긴 글이다. 이날 트럼프 당선자에게 공개적으로 축하를 전한 실리콘밸리 리더는 그뿐이 아니었다. 트럼프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물론이고 팀 쿡 애플 CEO,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 순다르 피차이 알파벳(구글 모기업) CEO,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등이 발 빠르게 축하 대열에 합류했다.
선거 승리 축하 인사 자체는 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8년 전 실리콘밸리를 돌아보면 작금의 분위기는 부자연스럽다. 오랜 기간 실리콘밸리에서는 민주당 지지 세력이 명백한 주류였다.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가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밀어내고 차기 권력을 꿰차자 올트먼은 “오늘 우리는 울고, 절망하고, 두려워한다”고 X에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당시 익스피디아를 이끌던 다라 코스로샤히 현 우버 CEO도 대놓고 슬픔을 표출했다. 그는 “내키지는 않지만 이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며 “우리(기술업계)는 우리나라와 크게 단절돼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올해 대선이 끝난 뒤 “압도적인 승리. 당신(트럼프)의 행정부와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며 환호한 것과는 180도 다른 반응이었다.
주요 테크업체 리더들의 이 같은 태세 전환은 ‘트럼프 시대’를 다시 맞는 실리콘밸리의 자세가 8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상징한다. 변화는 이번 대선 전부터 이미 감지됐다. 적으로 간주하는 이들에게 차별과 보복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 스타일’을 한 차례 학습한 실리콘밸리는 혹시 모를 트럼프 당선 가능성에 기민하게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언행과 활동을 철저히 삼간 것이다.
저커버그 사례가 대표적이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선거 관련 비영리 단체에 아내와 함께 4억2,000만 달러를 기부한 그는 트럼프 측으로부터 “민주당을 돕는 일”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저커버그가 2024 대선에서 불법을 저지르면)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낼 것”이라는 트럼프의 협박을 들을 정도로 사이가 틀어졌다. 저커버그는 지난 8월 짐 조던(공화당) 연방 하원 법사위원장에게 서한을 보내 “(이번 대선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거나, 어떤 역할을 한다는 인상조차도 주고 싶지 않다”며 정치와의 철저한 거리 두기를 스스로 약속했다.
아마존 창업자이자 우주탐사기업 블루오리진을 설립한 제프 베이조스는 2016년 대선 전”당신(트럼프)을 위해 내 우주선의 좌석 하나를 비워 놓겠다”고 조롱했던 일 등을 계기로 트럼프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그는 ‘트럼프의 반감’ 탓에 아마존이 국방부의 클라우드 계약을 따내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받았다고 주장해 왔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절대로 트럼프와 척지면 안 된다’는 신념이라도 갖게 된 것일까. 이번 대선 직전 베이조스는 자신이 소유한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가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지지’ 사설을 게재하지 못하도록 입김을 행사하는 무리수까지 뒀다.
WP는 올해 대선 전후 포착된 실리콘밸리의 변화에 대해 “이곳의 많은 기업이 이상적이기보다는 실용적·거래적인 정치 접근 방식을 채택하게 됐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이어 “예전에는 테크업계가 트럼프의 정책에 강하게 반발했으나, 이번에는 성장과 규제 완화 등을 이유로 트럼프 행정부와 협력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짚었다.
트럼프는 업계 인사들의 태도만큼이나 실리콘밸리의 미래에도 일대 변화를 불러올 전망이다. 그동안의 발언들을 토대로 누가 웃고, 누가 울게 될지에 대한 다양한 전망이 나오지만 현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하나뿐인 듯하다. 최대 수혜자는 트럼프의 당선을 물심양면 도운 머스크와 그의 기업들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미국 대선 이후 주요 빅테크들의 주가 흐름을 보면, 머스크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될 것이라는 데 시장도 의심을 갖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테슬라 주가는 대선 결과가 정해진 6일과 7일, 이틀 동안에만 약 18% 급등했다. 그 덕에 테슬라 시가총액은 8일 한때 1조 달러를 넘어섰다.
트럼프는 기술 산업에 대한 조언을 주로 머스크에게 구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테슬라와 X, 스페이스X, 뉴럴링크 같은 머스크의 기업들이 규제 완화 혜택을 볼 가능성이 큰 반면, 머스크와 대립각을 빚었던 기업인은 차기 미국 행정부와 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머스크와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는 올트먼, 머스크와 실제 몸싸움 직전까지 갔던 저커버그 등이 거론된다.
머스크는 지난 8일 트럼프-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트럼프-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간 전화 통화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가 ‘기업인 머스크’를 외국 정상과의 전화 회담에도 배석시킬 정도로 신임한다는 의미로 읽혔다. 이를 감안하면 머스크의 영향력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기술 정책을 넘어 인사·외교·정부 개혁 등 국정 전반에 미칠 수 있다는 관측마저 나온다.
구글, 트럼프 당선 ‘의외의 수혜자’ 되나
테슬라에 이어 대선 후 이틀간 주가가 많이 오른 기업은 의외로 구글이었다. 트럼프가 그간 구글을 ‘좌편향됐다’고 비판해 왔기에 구글이 트럼프 당선으로 불이익을 볼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지만, 투자자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4년 동안 테크업계를 옥죈 반독점, 자율주행 등 관련 규제를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대부분 완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이럴 경우 구글이 가장 큰 혜택을 입을 것이라는 게 시장의 관측이다.
애플도 이틀간 주가가 오르기는 했으나 상승폭(1.9%)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애플 투자자들은 트럼프가 중국에 대해 더 엄격하고 광범위한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며 “애플은 대부분 제품을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어, 그(트럼프)가 약속한 전면적 관세가 시행되면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규제 완화’를 내세워 바이든 행정부와의 차별화를 꾀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 활동에 대한 정부 개입이 최소화됨으로써 기업 인수합병(M&A)이 지금보다 활발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자금력이 풍부한 실리콘밸리의 빅테크들뿐 아니라 스타트업들도 수혜가 예상된다. M&A에 까다로운 잣대가 적용된 지난 4년 동안은 정부의 불허 결정을 피하기 위해 스타트업 창업자를 고용하거나 핵심 기술만 사들이는 방식으로 사실상 M&A 효과를 내는 편법이 횡행했다. 하지만 M&A가 보다 쉬워지면 스타트업들도 제대로 된 ‘몸값’을 받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
가상화폐, 인공지능(AI), 자율주행 같은 신기술 기반 산업과 시장은 더 큰 성장 기회를 맞게 될 전망이다. 특히 AI와 관련해 트럼프는 ‘미국이 중국보다는 무조건 앞서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AI 관련 행정명령을 취소하겠다고도 밝힌 바 있다. AI 행정명령은 개발 과정의 안전성 평가를 의무화하고 국가안보 및 공중보건을 위협하는 AI 개발을 규제하는 것이 골자로, 이를 폐기하면 관련 절차가 대폭 줄어 신속한 출시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예상이 결과적으로 무의미해질 가능성도 상당하다. 좀처럼 ‘예측 불가’하다는 게 트럼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첫 번째 임기 시절(2017년 1월~2021년 1월)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틱톡의 미국 내 사업 매각을 명령했지만, 재선 도전에 실패하면서 그 이전까지 논의됐던 거래도 최종 불발됐다. 올해 바이든 대통령이 같은 내용의 법안에 서명했는데, 트럼프는 외려 “틱톡을 구하겠다”며 강제 매각에 반대를 표했다. 그의 변덕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미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주변 인사들에 따르면 여전히 그는 구글 등 테크 기업들이 좌편향 태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머스크로 인해 기술 업계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기는 했으나 반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고 전했다. 트럼프의 재집권이 미국 기술 업계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