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대통령과 한강 작가 외에 또 다른 한국 태생 노벨상 수상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국내 언론들의 주목을 끌었다. 15일자 보도들은 노벨상위원회가 ‘한국 수상자’를 2명이 아닌 3명으로 집계하고 있다면서 1987년 노벨화학상 공동수상자인 찰스 피더슨이 부산 태생이라고 소개했다. 보도들은 수상 후보자의 국적을 고려하지 말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위원회가 국적이 아닌 출생지를 표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벨상위원회 홈페이지에는 찰스 피더슨이 “1904년 10월 3일 한국(지금의 남한) 부산”에서 태어났다고 표기돼 있다. 대한제국 시절의 부산이 출생지였던 것이다.

피더슨은 자기 생애를 소개하는 글에서 “그 시절 한국에는 외국어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가사키에 있는 수녀원 학교에 다니라고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회고했다. 대한제국 국권 침탈 2년 뒤인 1912년에 일본 학교로 가게 됐던 것이다. 대한제국에 외국어학교가 없었다는 그의 말은 부정확하다. 관립외국어학교를 비롯해 외국어를 가르치는 곳들은 있었다. 외국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가 없었을 뿐이다.

윗글을 보면 그와 한국의 인연이 만 8세 때 단절된 것 같지만, 그의 인터뷰를 담은 1987년 10월 15일자 <경향신문> 기사에는 ‘부산 태생… 한국서 17살까지 살아’라는 제목이 달렸다. 이 기사는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찰스 페더슨 씨는 14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부산에서 태어나 17세 때까지 한국에서 살았으며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매우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기사는 그가 17세 때까지 일본에서 공부했지만 “여름방학 등을 이용, 1년에 2~3개월간은 한국에서 생활했다”고 기술한다. 그래서 17세 때까지 한국에 살았다고 보도한 것이다.

피더슨의 한국살이, 일본의 조선 침략과 밀접한 관련

피더슨의 어머니는 일본인이고 아버지는 노르웨이인이다. “나의 어머니 다키노 야스이는 1874년 일본에서 태어났다”라고 피터슨은 위 노벨상위원회 글에서 말했다. 일본이 조선 시장을 강제 개방시킬 의도로 강화도 앞바다에서 운요호(운양호) 사건을 도발하기 1년 전에 그의 어머니가 출생했다. 그는 아버지에 관해서는 “내 아버지 브리드 피더슨(Brede Pedersen)은 노르웨이 선박 기술자이며, 청년기에 집을 떠나 증기화물선 기술자로 극동에 파견됐다”라고 썼다.

그의 어머니 다키노 야스이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그 집안이 대규모 무역을 했기 때문이다. 피더슨은 어머니에 관해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녀의 가족이 콩과 누에의 대규모 무역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녀는 가족을 따라 한국에 가게 됐다”라고 썼다.

외가가 조선과의 콩 무역에 종사했고 이 때문에 피더슨이 한국에서 태어난 사실은 그의 출생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자국 경제를 위한 식량 및 원료 공급지와 상품 판매지로 개조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외가가 취급한 콩 품목은 그 시기에 조선이 일본을 위한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전락하고 있음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농산물이었다. 그런 농산물의 대규모 무역에 종사했으니, 일본의 경제 침략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집안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조선 시장에서 열강의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는 임오군란이 있었던 1882년부터 동학혁명 및 청일전쟁이 있었던 1894년까지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시장 잠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성 주민과 직업 군인들의 항쟁인 임오군란이 1882년에 발생했다. 조선의 보수세력은 이 항쟁에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 없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1개월 만에 진압했다.

그런데 청나라의 파병은 공짜가 아니었다. 그 대가로 내정간섭이 시작됐다. 이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 기업들의 영향력을 증대시켜 조선 시장에서 후발주자 청나라가 선발주자를 추격하는 양상이 벌어지게 됐다. 이 양상은 1894년에 일본군이 조선에서 청나라군을 격파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청일 간의 경제적 경쟁이 심했던 그 12년 기간에도 콩은 조선이 일본을 위한 공급지로 전락하고 있음을 상징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청나라 및 중화민국(대륙 시절)의 세관 통계인 <중국 구(舊)해관 사료>의 ‘조선 부록’에 담긴 1885~1893년 조선 무역통계다.

9년간의 조선 무역통계가 청나라 해관 사료에 실린 것은 조선이 임오군란 이후로 ‘유사시 청나라군의 조선 진출’에 대한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은 결과로 무역통계마저 청나라 정부에 의해 집계됐던 것이다.

조선 부록에 따르면, 콩은 1885년과 1886년에는 쇠가죽에 이어 2위 수출품이었다. 그러다가 1887년에 쇠가죽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피더슨이 노벨화학상을 수상하기 100년 전인 그해에 조선의 콩 수출액은 멕시코달러 기준으로 33만 5415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41.7%였다. 이 비율은 이듬해에 가서는 54.4%로 올랐다. 1890~1892년 3년간 ‘쌀’에 1위를 내준 콩은 1893년에 다시 1위가 됐다.

그 9년간에 조선의 수출을 주도한 것은 콩과 쌀과 쇠가죽이다. 농산물과 피혁 원료가 수출을 이끌었던 것이다. 지금 같으면 ‘효자 종목’이나 ‘효자 품목’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이 시기와 관련해서는 그런 표현을 쓸 수 없다. 조선 경제가 제국주의를 위해 개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구한말 조선의 최대 무역파트너는 일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청나라의 영향력이 막강했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일본이 압도적이었다. 1882년 이전의 6년간 조선 시장을 선점해 둔 일본은 청나라의 내정간섭기 동안에도 시장 지배력만큼은 빼앗기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산 콩과 쌀의 목적지는 주로 일본이었다. 그런데 그 9년간 쌀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이동할 뿐 아니라 일본에서 조선으로도 이동했다. 이와 달리 콩의 흐름은 일방적이었다. 그래서 그 기간에 조선이 식량 및 원료 공급지로 추락하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쌀이 아니라 콩이었다.

콩이 그런 상징성을 갖는다는 점에 특히 주목한 쪽은 러시아 정부다. 일본과 청나라 못지않게 조선 시장에 욕심을 내고 있었던 러시아는 1900년에 발간한 재무부 자료를 통해 콩이 조·일 간에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분석했다.

1983년에 <구한말의 사회와 경제>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번역된 위 책자는 일본인들이 값싸고 질 좋은 조선 콩에 의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로 인해 일본에서 출현한 신종 풍경을 소개한다. 콩밭이 뽕밭으로 바뀌는 사례가 해마다 증가하는 현상이 그것이다.

뽕밭이 푸른 바다로 바뀐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와 달리, 19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한일 경제협력’의 결과로 콩밭이 뽕밭으로 바뀌어갔다. 이런 추세 속에서 피더슨의 외가가 한국과의 콩 무역을 결심하고 바다를 건너고, 그로 인해 1904년에 피더슨이 부산에서 출생했던 것이다.

콩을 매개로 경제가 수직적·예속적으로 통합되는 현상은 조선 땅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2006년에 <사림> 제25호에 실린 하원호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의 논문 ‘개항 후 부산의 대외무역과 유통구조의 변동’은 그 시기 조선에서 목화밭이 콩밭으로 바뀌는 사례가 증가했다고 설명한다. 대일 공급을 위해 목화밭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콩밭이 조성됐던 것이다.

피더슨의 아버지는 선박 기술자였고 어머니 집안은 대규모 무역상이었으며, 그가 8세에서 17세까지 공부한 곳은 일본이다. 이는 외가가 그의 성장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외가는 조선에 대한 경제 침략을 상징하는 콩 무역을 대규모로 수행하는 가문이었다.

그런 외가를 배경으로 성장한 인물이 1987년에 ‘한국 (태생) 최초’로 노벨상을 탔다. 1987년 노벨화학상은 수상자의 출생지가 한국이어서뿐 아니라 수상자의 출생 및 성장 배경이 한국의 식민지화와도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한국과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