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2월15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축구 경기장.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대표팀의 A매치 경기가 열렸다. 객관적 전력 면에서 잉글랜드가 앞선다는 관측을 깨고 전반 20분이 지나 아일랜드가 선제골을 터뜨렸다. 그러자 원정 팬들이 주로 앉아 있던 관중석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영국의 악명 높은 훌리건들이 선수들을 향해 물병 등을 집어던지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화가 난 아일랜드 축구 팬들은 스타디움에 내걸려 있던 잉글랜드 깃발을 끌어내려 찢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주최 측은 더는 경기 진행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전반 27분 시합 취소를 선언했다. 이 사건으로 50여명이 부상하고 40여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아일랜드는 수백년간 영국 식민지였다. 19세기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이 발생하자 영국은 ‘나 몰라라’ 외면했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아일랜드인 상당수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그 시절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이다. 1949년 독립국이 된 뒤로도 아일랜드는 영국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그런데 친(親)영국 성향의 아일랜드 북부 지역은 영국에 남는 길을 택했다. 지금의 영국령 북아일랜드다. 북아일랜드마저 영국에서 떼어내 아일랜드와 합치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조직한 단체가 바로 아일랜드공화군(IRA)이다. IRA가 영국을 겨냥해 일으킨 테러로 1990년대까지 3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8년 미국의 중재로 아일랜드, 영국령 북아일랜드 그리고 영국 3자 간에 벨파스트 협정, 일명 ‘성금요일 협정’(Good Friday’s Agreement)이 체결됐다. 이를 통해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남되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는 자유로운 인적·물적 교류를 보장 받는다는 약속이 성립했다. 그 뒤 테러는 잦아들었으나 영국을 향한 아일랜드인들의 유감이 사그라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2000년대 들어 아일랜드 경제가 극심한 침체를 겪으며 영국의 투자를 확대하고 영국과의 무역 등 교역을 늘릴 필요성이 제기됐다. 2011년 영국 국왕으로는 처음 아일랜드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는 예상보다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7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영국 정상으로는 5년 만에 더블린을 찾아 사이먼 해리스 아일랜드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브렉시트로 유럽연합(EU)을 떠난 영국과 EU 회원국인 아일랜드 간에는 서먹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두 정상은 “우리가 함께 미래를 열어 가자”고 의기투합했다. 양국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교환한 스타머와 해리스는 그날 더블린에서 열린 네이션스리그 잉글랜드 대 아일랜드 경기도 나란히 관람했다.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를 2-0으로 꺾자 아일랜드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으나 1995년과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아일랜드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지 지켜볼 일이다.